국제 > 아시아/대양주

[신동립 잡기노트]한국학자 박대종, 중국사 핵심연도 바로잡다…‘홍도관’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등록 2013-12-17 10:22:59  |  수정 2016-12-28 08:32:02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중국 수성만년력 (기원전 1046, 1018년)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396>

 갑골문의 제국 은(또는 상) 나라가 멸망한 지 3000여년이 지난 지금 동북아시아가 세계 문명과 역사의 중심으로 회귀하고 있다. 2000년 11월 중국 정부가 제9차 경제·사회 5개년 계획의 하나로 벌인 연대학연구사업인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완료한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이 동북아공동역사교과서 발간을 제안하자 일본의 주무부처 장관이 환영의 뜻을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한·중·일을 주축으로 한 동북아시아가 조상들의 찬란한 문화를 부흥시키고 함께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모두가 인정하는 바른 역사정립이 선결조건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상주단대공정은 국제적으로 신뢰도가 낮은 탄소-14연대측정법(OxCal 프로세스 시리즈 샘플계산법)을 채용하는 등 연구방법이나 결론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국제학술계가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스탠퍼드대학 종교문화센터의 겸직연구원인 장조체가 제출한 ‘서주(西周) 연대연구의 의문―하상주단대공정 방법론적 비평’은 물론, 2003년 12월 중국사회과학원·호북민족학원의 전문가들이 집대성한 현대판 ‘고사고(古史考)’에서조차 하상주단대공정의 결론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는 상태다.

 이러한 와중에 박대종 대종언어연구소 소장은 ‘천고학안(千古學案)―하상주단대공정 기실(紀實)’(악남 지음·2001) 이외의 하상주단대공정 총서들을 입수, 연구과정과 결과보고들을 검토했다. 그런데 역사학·고고학·천문학·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 200여명의 일류학자들이 적절한 전문과제 선정과 팀 조직하에 결정적인 연구결과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론단계에서 화룡점정의 역할을 맡은 유차원의 편견과 문제점 보고누락 및 허위보고로 인해 ‘다된 밥에 코풀기’ 식으로 공정이 왜곡된 것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 무왕이 상을 멸망시킨 연대는 의심의 여지없이 중국연대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동북아시아 문명사의 대문제다. 달리 말하면 그 연대가 잘못될 경우 그것을 기점으로 한 위쪽의 상대사와 아래쪽의 서주사는 모두 어그러지게 된다. 한국으로서도 그해 고조선의 하나인 기자조선이 시작했으므로 연대가 바로잡혀야 한국사도 바르게 정립될 것이니 일대 중요사가 아닐 수 없다.

 하상주단대공정을 건의한 송건이 제목을 쓴 ‘무왕극상지연대연구’(1997)에 따르면 무왕의 멸상(滅商) 연대와 관련해 기원전 1127~1018년 총 44종의 학설이 수집돼 공정에 반영됐다. 공정의 전문가팀은 중국과학연구원 섬서천문대의 천문학자 유차원의 최종 검토결과 보고를 받아들여, 미국의 데이비드 판케니어가 BC 1059년 5월28일의 오성취(五星聚) 천체현상을 근거로 도출한 바 있는 ‘기원전 1046년설’을 상나라 멸망연대로 선택하고, 목야대전(牧野大戰)이 치러진 갑자일을 최종 BC 1046년 1월20로로 확정했다.

 그러나 공정의 마지막 릴레이 주자라 할 수 있는 유차원의 보고서를 살펴본 결과,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

 첫째, 그는 ‘송서(宋書)’ 천문지의 “주나라가 주왕(紂王)을 벌하려 할 때 오성취방 현상이 있었다(周將伐紂五星聚房)”는 기록과 일치하는 BC 1019년 9월17일의 오성취방 사실을 장배유에 이어 확인했음에도 무시하고 허위보고했다.

 둘째, 이궤(利簋)의 “갑자일 새벽, 목성이 중천에 떠있었다”는 기록과 BC 1046년 1월20일 새벽의 상황은 전혀 맞지 않아, 그러한 불일치로 인해 이궤와 관련된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그러한 문제점을 보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어·주어하(國語·周語下)’에서 악관(樂官) 영주구가 말한 무왕극상 당시의 동계천상(冬季天象) 및 기상상황이 부합되지 않아, 영주구의 발언은 모두 증거자료에서 제외시켜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셋째, 고대의 월상(月相) 용어인 생백(生霸)과 사백(死霸)에 대한 유흠 이래의 전통적 개념을 버리고 정반대의 다른 이론을 수용한 결과 BC 1046년 1월20일 무렵의 월상은 유흠의 이론과는 맞지 않았다.

 넷째, ‘사기(史記)’ 주본기에 따르면 주 나라 군사들이 맹진(孟津)을 넘은 일자는 12월 무오일이고 목야대전일은 그로부터 67일이 지난 이듬해 2월 갑자일인데, 무시하고 동일연내의 7일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몰역사적 편견을 고집했다.

 오성취는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의 5성이 함께 밀집취합하는 매우 보기 드문 천체현상이다. ‘송서’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 기록된 제신(帝辛) 시기의 오성취방이란 5성이 전통적 별자리인 28수 중 방수 부근에 모이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고등과학연구원 박창범 교수에 따르면 지난 4000년 간 다섯 행성들이 10도 이내로 모이는 일은 평균 250년에 한 번 꼴로 매우 희귀한 현상이다. 따라서 실재했던 오성취 현상은 후대인들에 의한 위조가 불가능해 결정적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BC 1046년 1월20일 아침 6시
 하상주단대공정 총서 중 하나인 종천재단도무왕벌주(從天再旦到武王伐紂)에는 공정팀이 밝혀낸 두 개의 오성취 현상이 기록돼 있는데 하나는 BC 1059년 5월28일의 오성취 정(井)이고 다른 하나는 BC 1019년 9월17일 서쪽에서 보였던 오성취 방(房)이다. 그러나 5성이 정수(井宿)에 모인 BC 1059년의 오성취정은 고문헌의 오성취방과 별자리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고려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물론, BC 1059년은 다른 사항들과도 부합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BC 1019년 9월17일의 오성취방은 고문헌들에서의 오성취방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는 결정적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44종의 학설 중 BC 1018년설과 부합한다. 주나라 무왕의 군대는 오성취방 현상이 있었던 얼마 후에 주나라로부터 출발했고 ‘사기’ 주본기의 기록대로 12월18일 무오일에 맹진에서 황하를 건넜으며, 그 다음해 BC 1018년 2월22일 갑자일에 마침내 상나라를 정벌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유차원은 BC 1019년 9월17일의 오성취방이 ‘사기’ 기록을 통한 BC 1018년설과 부합함에도 사실과는 반대로 “필수적으로 밝히는 바는, 오성합취의 천상은 견강부회하고 위조되기 쉬우며, 당(唐) 이전의 기록은 계산결과와 부합하는 것이 없다. … 총괄적으로 말하면, 오성취로써 무왕벌주의 날짜를 내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허위보고했다.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이가 결과적으로 중국정부와 국민을 속인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오성취방 기록의 진실성은 목야대전 전에 제작된 제신 홍도관(帝辛 紅陶罐) 또는 제신 점도관(占陶罐)의 명문(銘文) 중 금현(金見)과 각명(角明)이 은상(殷商)인들의 용어임을 입증해준다. 금성없이 오성이 있을 수 없고 오성없이 금성의 개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28수 체계 중 동방 7수에 속하는 방의 명칭이 존재했다는 것은 당연히 그 시대에 동방 7수의 으뜸 별자리인 각의 명칭이 실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역도 성립한다.  

 즉, 현대 첨단천문학에 의해 사실로 입증된 중국 고문헌의 제신시기 오성취방의 기록과 제신 점성도문(占星陶文)의 각명과 향정(亯井)의 기록은 28수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 고천문이 춘추시대에 인도 천문학의 영향으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상제신 시기에 이미 독자적으로 완비돼 있었음을 증명한다.

 무왕극상 BC 1018년설을 주장한 이는 대만의 언어학자 주법고(1915~1994)다. 그는 1971년에 영문판 ‘서주연대고(西周年代考)’를 통해 이 설을 발표했다. 당시 그는 무왕이 즉위한 연대를 BC 1028년으로 보고 그해부터 계산해 무왕 11년째인 BC 1018년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무왕 즉위 차년인 BC 1027년부터 BC 771년까지 계산한다면, 고본 ‘죽서기년’의 ‘무왕에서 유왕까지 257년이다’라는 기록과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이 ‘서주 257년’ 기록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주법고는 1983년 ‘서주연대신고(西周年代新考)’를 발표하면서 BC 1045년 설을 새로이 주장했다. 기존의 BC 1018년 설을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연도에 맞추기 위해 ‘죽서기년’의 ‘서주 257년’ 기록을 ‘서주 275년’의 오전(誤傳)으로 보는 주장에 동조했다. 이렇게 원주창자로부터 버림 받은 때문인지 유차원을 비롯한 하상주단대공정의 관계자들 그 누구도 BC 1018년 설에 주목하지 않았다.

 1976년 3월 섬서성에서 발견된 이궤(또는 무왕정상궤)는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한 지 8일째 되는 날에 이에게 청동을 하사해 제작한 중국의 국보급 유물이다. 그런데 하상주단대공정 측이 해석한 바에 따르면 “무왕이 상을 정벌한 갑자일 새벽 목성이 중천에 떠있었다(武王征商唯 甲子朝 歲鼎)”는 기록이 거기에 새겨져 있다. 무왕극상 당시의 당사자들이 기록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은주단대공정의 결론은 사리상 반드시 이 기록과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는 별자리 프로그램 스텔라리엄 0.12.4로 확인해본 결과,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유차원이 결정적 역할을 해 최종선택된 공정의 결론인 BC 1046년 1월20일 새벽 6시에는 목성은 서쪽 하늘에 낮게(고도 27도) 떠있어 이궤의 새벽 아침 중천 기록과 부합하지 않는다. 유차원의 보고서에는 “자야세성중천(子夜歲星中天) 기달천정(几達天頂) 79도, 특별명량(特別明亮)”이라고 한밤중 상황만 강조돼 있고, 새벽 상황은 누락됐다.

 이러한 불일치는 필연코 이궤와 관련된 큰 문제점을 발생시킨다. 유차원을 비롯한 공정관계자 누구도 그 문제점을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즉, 무왕극상일에 대한 하상주단대공정의 결론 BC 1046년 1월20일(갑자) 새벽에는 목성이 중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왕정상(武王征商) 유갑자조(唯甲子朝) 세정(歲鼎)”이라고 기록된 이궤는 위작임이 중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위작이 아니라면 이궤 명문에 대해 “무왕이 상을 정벌한 갑자일 새벽 목성이 중천에 떠있었다”는 공정 측의 해석이 틀린 것임이 공정 스스로의 결론에 의해 입증된 셈이다.

 ‘국어·주어하’에는 무왕극상 연대로부터 약 500년이 지난 동주경왕(東周景王) 시기, 악관 영주구가 왕에게 음악용어 7률에 대해 답변하는 과정에서 무왕극상 당시의 천체현상과 날씨에 대해 마치 당시상황을 직접 본 사람처럼 구체적으로 발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영주구는 “무왕은 2월 계해일 저녁에 목야에서 진을 펼쳤습니다. 대열이 완전히 갖춰지지 않았을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王以二月癸亥夜陳 未畢而雨)”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차원은 ‘국어’ 본문의 동계천상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구당서·예의지1’의 “무왕벌주설심장여(武王伐紂雪深丈余)”, ‘주서·유번전(周書·劉番傳)’의 “경진유칠척지후(庚辰有七尺之厚) 갑자유일장지심(甲子有一丈之深)”이라는 적설량 기록과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영주구는 “석 무왕벌은(昔 武王伐殷) 세재순화(歲在鶉火) 월재천사(月在天駟) 일재석목지진(日在析木之津) 진재두병(辰在斗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텔라리엄 0.12.4로 확인한 결과, 공정의 결론 BC 1046년 1월20일 새벽에 수성(진성)은 지표면 아래에 있어 하늘에 출현 자체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그날 일몰 무렵의 수성 위치 또한 실수와 벽수 사이에 있어 두병에 있다는 말과는 부합하지 않았다. 위 문장이 영주구가 지어낸 이야기로 보이는 까닭이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제신 홍도관 (또는 점도관)
 이와 같은 이유로 유차원은 영주구가 말한 천상에 대해 “사실 상당히 의심스럽다(確相當可疑)”고 했다. 이처럼 영주구의 발언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적 프로젝트의 증거자료로 채택하는 것은 절대금물이다. 그러나 유차원은 위험천만하게도 위 문장에서 세재순화를 뚝 떼어 무왕극상의 갑자일 상황과 긴밀히 연결시켰다. 수성의 위치에 대한 진재두병이 무왕극상일과 부합되지 않으면 당연히 그것과 함께 쓰여진 세재순화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버려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결정적 자료로 취했다. 결국 이러한 무모함이 하상주단대 공정을 잘못된 결론으로 이끈 것이다.

 유차원은 ‘한서·율력지(漢書·律曆志)’에서 인용한 ‘상서·무성(尙書·武成)’ 중의 무왕극상 관련 계열의 역일기록인 ①“일월임진방사패(一月壬辰旁死霸)” ②“삼월(당작이월)(경신) 기사(三月(當作二月)(庚申) 旣死霸) 월오일갑자(越五日甲子)” ③“사월(을사) 기방생백 월육일경술(四月(乙巳) 旣旁生霸 越六日庚戌)”을 중시했다. 여기에서 월상용어 사백과 생백은 무엇일까? 위 ①②③ 문장을 인용한 ‘한서·율력지 하(下)’에 “사백 삭야 생백 망야(死霸 朔也 生霸 望也)”라고 설명이 나와 있다. 유차원은 그의 논문 ‘무성역일해석(武成曆日解析)’에서 이 설에 따라 기사백은 음력 0~2, 방사백은 음력 0~5, 기생백은 음력 15~17일로 정리했다. 그리고 “4월에는 을사일이 없다”고 확인했으니 당연히 ③의 사월은 삼월의 오기다.

 이와 같은 전통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상주단대공정의 결론 BC 1046년 1월20일을 중국의 수성(壽星) 천문력과 대조해보자. 1월20일 갑자일로부터 계산해 5일을 거슬러 올라간 1월16일 경신일은 무성편에 기사백이라고 적혀있으므로 음력 0~2이어야 하는데 음력 18일로 맞지 않다. 그에 비해 BC 1018년 2월18일 경신일은 음력 초2로 위 무성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기·주본기’와 앞서 언급한 ‘상서·무성’에는 2월 갑자일에 무왕 극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은력에서의 2월은 인월(寅月)이다. ‘춘추’ 은공 원년조 공영달의 소(疏) “하이건인지월위정(夏以建寅之月爲正) 은이건축지월위정(殷以建丑之月爲正) 주이건자지월위정(周以建子之月爲正)”에서와 같이 은은 축월을 1월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상주단대공정의 결론 BC 1046년의 1월20일은 갑오년 정축월 갑자일로 은력으로는 1월이 돼 ‘사기·주본기’와 ‘상서·무성’의 2월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박대종 소장이 도출한 BC 1018년 2월22일은 계해년 갑인월 갑자일로 은력으로도 2월이 되며 주본기와 무성편의 기록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은상의 후국(侯國)이었던 주 나라가 무왕극상 후 한참의 세월이 지나 사(祀)를 연(年)으로 바꾼 예에 비춰 볼 때, 목야대전 당시에는 은력을 썼고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나 자월(子月)을 1월로 하는 주력으로 개정했다고 보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이다.

 ‘사기·주본기’에 기록된 것처럼 주 나라 군사들이 맹진을 건넌 12월 무오일에서 목야대전의 2월 갑자일 간의 일수는 총 67일이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는 당연히 계사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67일 간격을 무시한 하상주단대공정의 7일 결론 “1월14일 무오~1월20일 갑자”에는 계사일이 없다.

 1977년 봄, 은 나라의 수도인 조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주 나라 지역 주원(현 치산현과 푸펑현 일대)에서 갑골이 대량 출토됐는데, 그 중 H11:1 갑골에서 은상 최후의 왕 제신이 목야지전 전 계사일에 선왕에게 제를 지낸 기록이 발견됐다. 갑골문 전문가인 왕우신은 저서 ‘갑골학 통론’에서 H11:1과 관련, “그 기간이 총 67일이다. 계사일에 제신이 개국선왕인 성당에게 도움을 바라고 제사를 거행했을 때는 무왕의 군대가 맹진을 건넌 무오일과 이미 46일(36일의 오기)의 거리가 있으며, 갑자일에 결전한 날과도 31일 내외의 거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즉, H11:1 복사(卜辭)에 따르면 주 나라 군대가 맹진을 건넌 무오일과 목야대전의 갑자일 사이에는 제신이 그에 대응해 제사를 올린 계사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는 ‘사기’의 기록이 옳음을 입증하는 매우 중요한 상제신의 증거물인데, 하상주단대공정에서는 그 비중이 결코 이궤 못지않은 H11:1을 소홀히 했다.

 정리하면, 주무왕은 BC 1029년에 즉위했고 12년째인 BC 1018년 2월22일(계해년 갑인월 갑자일)에 상 나라 정벌을 성취했다. 즉위 차년인 BC 1028년에서 BC 771년을 빼면 257년이 되는데 이는 고본 ‘죽서기년’의 서주 257년 기록과 부합한다.

 BC 1019년 9월17일 중국 서쪽 하늘에 오성취방 현상이 있었다. 이를 관찰한 서주는 때가 됐다고 판단한 후 전쟁 준비기간을 거쳐 드디어 군사를 이동, BC 1019년 12월18일(무오)에 맹진에서 황하를 건넜다. 그러나 주 나라 군대의 내침 사실을 감지한 상 나라의 대응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제신은 BC 1018년 1월22일(계사) 직전에 나라의 안녕과 관계된 점성기록을 새긴 제신 홍도관(또는 제신 점도관)을 제작했고, 계사일에 선왕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 정벌전에 임했다. 하지만 수차례의 접전과 저지에도 불구하고 BC 1018년 2월22일(갑자) 최후의 전투인 목야대전에서 무왕이 극상의 대업을 성취했다.

 상 나라가 멸망한 그해 기자는 동쪽으로 이동해 후조선을 건국했다. 기자조선은 BC 194년 41세 준왕에 이르러 위만에게 멸망할 때까지 824년 간 존속했고, 준왕이 세운 마한의 203년을 합하면 총 49세 1027년 간 지속된 천년왕국이었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국제 핫 뉴스

피플

"좋은 일한다 소리 싫어…
아이들 돌봄, 꼭 해야할 일"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