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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고려 왕건이 잠든 무덤에 들어가다

3회 – 조선과 북녘에서 ‘특별대우’ 받은 고려 태조 현릉(顯陵) 2003년 2월 23일 3시경, 1994년 북한이 대대적으로 개건해 새로 조성한 왕건의 무덤인 현릉(顯陵)에 도착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고려 궁궐(만월대) 서쪽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 남쪽 기슭에 있다. 현릉은 태조 왕건이 죽은 943년 5월에 만들어졌으며, 첫째 왕후인 신혜왕후 유 씨와 함께 묻힌 합장묘다. 주차장에 내리니 홍살문 대신 자주색 기와를 덮은 커다란 삼문이 서 있다. 삼문 앞 동쪽에는 1993년 김일성 주석이 쓴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가 세워져 있고, 정면에 커다란 규모의 왕건릉이 보인다. 삼문에서 봉분까지에 이르는 완만한 비탈길에는 돌을 깔고, 그 좌우에는 정자각과 비각을 새로 세웠다. 서쪽의 정자각 안벽에는 왕건 화상(像, 초상화)을 비롯해 왕건 생애도가 전시돼 있다. 아쉽게도 왕건의 화상은 당대의 진본이 아니다. 이 화상은 1918년에 재판한 왕 씨 족보에 그려진 화상을 토대로 새로 그린 것이다. 고려 때도 왕의 진영(眞影)이 그려져 사찰 등에 봉안됐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비각에는 신도비(神道碑·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 동남쪽의 큰길가에 세운 석비 )와 개수기실비가 들어 있다. 비석은 1867년 현릉을 중수하고 세운 것이고, 비각은 개선할 때 새로 지었다. 새로 만든 왕건릉은 잘 다듬어진 봉분을 비롯한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 석등, 4마리의 돌 호랑이, 무인석, 문인석을 갖추고 있는데, 모두 새로 만든 것이어서 사진에서 보던 옛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사진을 찍고 돌아서려는데 뜻밖에도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한다. 능의 서쪽에 무덤 칸(묘실)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석문 앞에는 조선 시대에 세워진 비가 옮겨져 있었다. 무덤 칸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 벽에 원래 왕건릉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던 병풍석이 전시돼 있다. 북한이 왕건릉을 개건하면서 병풍석을 새로 만들고, 진품은 이곳에 옮겨놓았다. 무덤 칸으로 들어가자 왼쪽에 왕건이 사용했다는 고려청자 등 일부 출토 유물이 놓여 있다. 무덤 칸은 화강암의 판석을 이용하여 사방의 벽을 만들었는데 상부는 단을 두어 좁힌 뒤 천장돌을 올렸다. 무덤 칸 바닥의 중앙에는 관대가 있고, 관대의 좌우로 벽과 맞닿게 설치한 부장을 위한 단이 마련되어 있다. 무덤 칸의 네 벽면과 천장에는 벽화가 그러져 있었다, 동서벽의 벽화만이 뚜렷하게 확인될 정도였다. 동벽에는 매화나무, 참대, 청룡의 꼬리 부분이 남아 있으며, 서벽에는 소나무(老松圖), 매화나무가 벽면 전체에 그려져 있으며 백호의 모습도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북벽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현무도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천장에는 별자리 그림이 그려졌다고 하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대나무·매화그림이 정교하게 그려진 이 벽화는 한국 최고의 문인화로 평가된다. 왕건릉이 몇 차례 이장됐기 때문에 벽화가 언제 그려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북측 해설 강사는 벽화에 네 차례 덧칠한 흔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무덤 훼손이 걱정됐지만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 2013년 세계문화유산 지정뒤 완건릉 새로 정비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2013년 개성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왕건릉도 여기에 포함됐다. 최근 입수된 사진을 보면 북한은 삼문 앞에 세계문화유산 표식비를 세우고, 봉분 뒤쪽에 곡장(曲墻)을 새로 조성했으며, 묘역 왼쪽에 있는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표지석을 새로 세워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현재 왕건릉 원형 사라져 현릉은 외적의 침입으로 몇 차례 이장의 아픔을 겪었다. 1018년(현종 9) 거란이 침입하자 현릉은 부아산 향림사로 잠시 옮겨졌으며, 1217년(고종 4)에 거란 유족이 국경을 침입하자 다시 태조의 재궁은 봉은사로 옮겨졌다. 또한 1232년(고종19) 강화로 천도하면서 현릉은 강화로 이장되었으며, 환도한 1270년 임시로 이판동에 옮겼다가 1276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현릉 자리가 처음 태조가 묻혔던 바로 그 자리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현릉이 송악산 서쪽 파지동 남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 시대 때도 파지동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원래의 자리로 이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성종 때 유학자인 유호인(兪好仁, 1445~1494년)은 성종 8년(1477년)에 개성을 다녀온 후 기행문인 유송도록(遊松都錄)을 남겼다. 여기에 태조 현릉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갈 길을 재촉하여 저물녘에 보현원에 도착하였다. 보현원 서쪽으로 돌아서 파지동(巴只洞)에 들어가서 고려 시대 왕릉의 소재를 물었다. 촌 할머니 한 분이 저쪽에 있는 산모퉁이를 가리킨다. 과연 그쪽에 조그만 구릉(丘陵)이 우거진 잡초 사이로 바라보인다. 그 곁에 한 자쯤 되는 비석이 하나 서 있고 거기에는 고려 시조 현릉(顯陵)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 앞의 석상(石牀) 밑에는 풀들이 이리저리 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치성 드린 흔적이 있었다.” 이 기행문을 통해 조선 성종 때 2명의 능지기가 있었고, 세시(歲時, 명절)와 복납(伏臘, 삼복 날과 섣달그믐)에는 짐승을 잡고 술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나 관리가 썩 잘 된 것은 아니었다. 현릉은 또한 1906년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진 적이 있으며, 한국전쟁 중에도 파괴되었다가 1954년에 복구됐다. 1910년대 일제가 찍은 사진이나 전쟁 후 복구된 현릉은 거의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의 왕건릉은 1992년 발굴조사 후 공민왕릉의 조각수법 등을 본 따 새로 조성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이 됐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16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원형 난간석, 장명등, 문인석 등의 석물들이 삼문 왼쪽에 전시해 놓은 것이 사진으로 확인된다. - 왕건, 미완의 민족통합 최종 해결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하고 통일국가 고려를 건국한 인물이다. 877년 송악군의 사찬인 왕융(王融)의 아들로 태어나 한반도 중부지역을 석권한 궁예(弓裔)의 부하가 되어 서해안 일대를 비롯하여 경상남도까지 공략하는 등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 시중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나 궁예의 폭정과 위협에 반기를 들어 휘하 장수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태봉국의 수도 철원에서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다. 다음 해인 919년에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가 있는 지금의 개성인 송악으로 옮겼으며 궁성을 송악산 아래에 정했다. 이후 왕건은 신라를 포용하는 정책을 통해 935년에는 신라를 흡수하였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 시켜 ‘삼한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또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936년 거란에게 멸망하자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10만에 달하는 발해의 유민을 포용하여 통일신라 혹은 남북국시대로 불렸던 미완의 민족통합을 최종적으로 해결하였다. 하지만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한 고려에는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할 만한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고려의 영역으로 통일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이룬 후 7년을 더 살다가 사망하였다(943년). 후대에 벌어진 거란과의 전쟁에서 개경이 점령되면서 국초의 기록이 상당수 사라져, 통일 후 7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다. 왕건은 즉위 이후부터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후대의 왕들을 위해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통치의 주요 방향을 제시했다. 왕건이 내린 여러 가르침은 ‘태조의 유훈(遺訓)’으로 고려 왕조 내내 존중되었다. 북한은 고려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규정해 높이 평가하고 있고, 왕건릉을 역사 교양의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왕건릉을 찾는 개성 시민들의 달라진 모습이다. 이곳을 찾은 많은 방문객이 해설 강사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확인된다. 북한 전역에 600만대 이상의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풍속도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고려 역대 왕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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