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광장

[소녀상을 응시하다]문화적 현상으로 격상된 '평화의 소녀상' 건립 열풍

등록 2017.08.20 07:30:00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블로그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서울=뉴시스】김동민 기자 = 제97주년 3·1절인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에 한 시민이 올려놓은 태극기가 덮여있다. 2016.03.01. life@newsis.com

【서울=뉴시스】김동민 기자 =태극기를 두르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손대선 박대로 임재희 기자 = 광복 72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 열풍이 뜨겁다.

 건립 7년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조선을 침탈한 일본 제국주의 반인륜적 범죄의 상징이 된 '평화의 소녀상'. 뉴시스는 소녀상 열풍의 의미와 그 이면에 깔린 또다른 의미를 짚어본다.<편집자 주>
 
 ◇'천일의 외침' 소녀상으로 승화

 소녀상 건립의 시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군 '위안부' 해결을 촉구하며 외로운 집회를 벌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였다.

 앞서 1991년 8월14일 정대협 사무실에서 지금은 별세한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 거주자로서는 처음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용기 있게 공개 증언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공론화됐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이들의 아픔에 공감한 시민, 대학생 등이 주축이 된 정대협은 이듬해 종로구 일본대사관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집회를 열어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폭로했다.

 하지만 집회는 오랜 기간 외면받았다. 외면의 주체는 일본만이 아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정부와 국민들의 외면에 또다른 상처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소녀상 건립은 첫번째 정대협 집회가 치러진지 20년 뒤에 이뤄졌다. 소녀상 조각가 김운성씨에 따르면 김씨는 2011년 1월 종로구 인사동에 나갔다가 일본대사관 인근서 벌어지는 정대협 시위를 우연히 목격했다. 김씨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정대협쪽에 미술가로서 공헌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이후 정대협쪽에서는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기리는 비석을 주문했지만 김씨는 일본측의 반발이 생각보다 격렬하자 정대협측에 평화의 소녀상을 역제안했다고 한다.
 
 김씨는 역시 조각가인 부인 김서경씨를 합류시켜 전쟁의 아픔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을 소녀상으로 형상화했다. 

 2011년 12월 14일 김운성·김서경이 공동제작한 평화의 소녀상이 마침내 건립됐다.

 소녀상은 국권상실기 조선 소녀의 모습이다. 단발머리는 부모와 고향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또한 발꿈치가 들린 맨발은 전쟁후에도 정착하지 못한 피해자들의 떠돔을 상징한다.

 이듬해 마포구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에 비슷한 콘셉트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2013년 4개, 2014년 6개로 늘어난뒤 2015년부터는 매년 20개 이상씩 세워지고 있다.

 ◇남녀노소 자발적 모금이 전국화 기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이 이제 우리 사회의 문화적 현상이 됐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현재 전국적으로 세워진 소녀상은 정확한 수량을 가늠하기 어렵다. 명칭이나 성격 등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라는 공통점을 놓고 본다면 90개 안팎의 소녀비가 이미 건립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일본 정부가 2015년 12월 28일 피해자는 배제한 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 방안에 합의했다며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하면서 소녀상 철거를 밀약했다는 얘기가 전해지자 소녀상은 전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됐다.
 
 남녀노소가 자발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모금 비용을 마련해 건립하기도 하고, 지자체와 시민단체가 결합해 건립비용을 충당하기도 한다. 어린 학생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어난 점이 주목된다.

 소녀상의 확산세가 가장 큰 곳은 역시 서울이다. 광복절을 전후로 금천, 도봉, 강서구에 소녀상이 예정대로 건립되면 서울에만 올해 안에 14개의 소녀상이 세워질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 자치구가 소녀상 건립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만큼 이 같은 흐름 속에서면 수년 내 서울의 모든 자치구에서 소녀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민적 항의 수단으로서의 소녀상
 
 소녀상의 의미는 우리사회에서 갈수록 확장되고 있다. 위안부 합의 이후 일본측의 계속되는 철거 압박과 졸속 협상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소녀상은 국민적 항의의 수단으로 격상됐다.

 일각에서는 소녀상의 전국적인 확산을 신(新) 국채보상 운동이나 IMF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 이상의 것으로 평가한다.

 지난해 3월19일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미술문화공간인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린 토론회 '소녀상의 예술학'에서는 소녀상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짚었다. 이같은 시도는 소녀상 열풍이 분 이래 사실상 처음이다.

 미술평론가 이태호, 김준기, 문화평론가 이택광 등 3인이 발제를 하고 일본인 미술평론가 이나바 마이, 디자인 평론가 최범, 미술가 홍승희, 인문학 연구자 장수희 등 4인이 토론자로 참여한 이 토론회의 내용은 서울문화재단 기관지인 '문화+서울' 2016년 4월호에 실렸다.
 
 참가자 대부분은 소녀상이 단순한 조형 이상의 의미로 발전된 것에 주목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해당 토론회에서 김준기씨는 소녀상의 장소성(일본대사관 앞에 있는)이 갖는 효과와 함께 그것이 갖는 상징투쟁의 측면에 주목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는 상투적인 어법이지만, 소녀상이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는 역사성과 장소성으로부터 나옵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앉아 있다는 점, 그것이 위안부 의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에 소녀상은 그냥 소녀가 아니라 상징투쟁의 장으로 증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위안부 관련 합의 때문입니다. 상징투쟁의 장이 한국 대 일본의 국가주의 프레임에서 국가와 시민으로 전환된 겁니다. 이 대목에서 민족 정동(情動)으로부터 사회 현상으로 이 작품에 대한 독해의 방향을 틀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태호씨는 일본측의 소녀상 철거 요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해 반박했다.

 "이 작품은 어디에 세워졌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위치에서는 표현에 상당한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피가 심하게 흐르거나 속살이 드러나는 등의 표현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감동을 받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분들의 고통에 비해 너무 얌전하고 소극적인 표현이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일본대사관이 움직이지 않는 한 '평화의 소녀상'은 그 어떤 협약이나 권력에도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품은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위치를 떠나면 허약해질 수 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대협 윤미향 상임대표는 뉴시스와의 전화통화에서 개인적 의견임을 전제로 "지역의 의지를 모았다는 점이 중요하다"며 현재 전국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소녀상 건립의 의미를 평가했다.

 윤 대표는 "우리(정대협이) 20년 넘게 (집회를)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며 "지역에서 함께하고 가시화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그동안 관심없었던 것에 대한 주의환기가 되고 있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소녀상 건립의 주체가 되고 있는 중고등학생들의 자발적 참여에 대해서는 "사회적 칭찬이 필요하다"며 "이같은 관심을 지역에서 위안부 문제 뿐만 아니라 전쟁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