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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 ①잠들지 않는 남도 4·3의 넋들

등록 2018.03.29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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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뉴시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1948년 4월3일 일어난 4·3사건 당시 도민들은 이 사진처럼 군경의 무차별 토벌을 피해 산으로 피신해 움막을 짓고 숨어 살았으나 토벌대에 의해 발견돼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제주도 제공>

【제주=뉴시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1948년 4월3일 일어난 4·3사건 당시 도민들은 이 사진처럼 군경의 무차별 토벌을 피해  산으로 피신해 움막을 짓고 숨어 살았으나 결국 토벌대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제주도 제공>

【제주=뉴시스】강정만 기자 =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지난 27일 제주도청 탐라홀에서 4·3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안치환 글·곡)’가 4·3 평화합창단의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제70주년 4·3희생자 추모제 마지막 준비 보고회 자리였다. 이 합창단은 4·3 희생자 유족 60대와 70대 60명으로 구성됐다.

제주는 해마다 4월3일이 되면 원혼(冤魂)은 잠들지 않고, 산자들은 잠을 못 이룬다. 그래서 4·3은 비극과 한의 역사가 됐다.

 정부와 학계자료 등에 따르면 4·3 당시 제주마을 109개가 없어졌다. 정부가 신고를 받고 확정 발표한 희생자 수자는 1만4232명이다. 진상보고서에는 3만명으로 나온다. 유족은 5만9426명이다. 희생자 3만명은 제주도 인구 30만명의 10분의 1이다. 희생자 중 33%는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이·노인·여성이었다. 3만명의 희생자 중 86%는 군·경 토벌대에 의해, 14%는 무장대에 의해 학살됐다.

 당시 10대였던, 아버지, 어머니, 삼촌, 이웃의 죽음을 목격했던 유족들은 이제 80대가 됐다. 이들의 가족들이 합창단을 구성하고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를 부른다. 이들의 노래는 이 땅에 다시는 이런 비극을 없애달라는 취지의 기도다.  

 제주4·3은 해방 2년 후인 1947년 3월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로 시작된다. 당시 도민 3만명은 제주북교에 모여 자주독립과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애원을 함성으로 표현했다. 오후 2시 집회가 끝난 후 시위대가 관덕정 서쪽으로 빠져 나갈 즈음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어 다쳤다. 말발굽에 다친 아이를 그냥 두고 가는 기마대를 향해 흥분한 군중이 돌을 던지며 항의한다.

 ◇관덕정 앞 총성이 4·3 도화선

 1947년 3월1일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 이윽고 총성이 울렸다. 제주경찰서 망루에서 미군정 경찰이 구경꾼들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3.1 대회를 앞둬 제주지역에는 100명의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경찰이 있었다. 이들의 발포였다.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그때 까지만 해도 이 총소리가 3만명의 희생자를 낼 4.3사건의 도화선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후부터 도민의 거센 항의가 이어지고. 1947년 3월10일부터 시작한 총 파업은 22일에는 제주도 전체의 총 파업으로 바뀐다.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고 공무원들조차 일손을 놓아 버렸다.

 미군정 경찰은 제주도를 아예 ‘빨갱이 섬’으로 규정한다. 3.1 대회 참가자들은 검속 한 달 만에 500명이 체포됐고, 수형자는 245명이 이른다.

특히 1947년 3·1 사건 이후 미군정의 지시를 받아 북을 고향으로 둔 서북청년회와 타 지역 사람으로 구성된 응원경찰대가 대거 들어오면서 도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무차별 폭력을 당했다. 민심은 이에 따라 더욱 흉흉해졌다.

당시는 남쪽만의 단독선거 시기였다. 이런 민심 속에서 이를 막겠다고 1948년 4월3일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도내 4개 경잘 지서 중 12개가 습격당하고 14명이 사망했다. 그들은 “탄압이면 항쟁이다”고 선언한다.

【제주=뉴시스】 4·3 희생자 분포지도<제주도 제공>

【제주=뉴시스】 4·3 희생자 분포지도<제주도 제공>

이것이 우리가 얘기하는 4·3사건의 얼개다.

1948년 4월3일 이전까지 1년 사이에 도민 2500명이 잡혀갔다. 그해 10월17일부터 강력한 토벌이 시작된다. 이날 제주지역 토벌대는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은 적성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린다. 11월17일에는 계엄령이 내려진다.

◇중산간 마을 대부분 소실…군경, 남아있는 주민 사살

중산간 마을이 대부분 불살라졌고 그 지역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사살해 버렸다. 여성이나 어린이, 노약자라고 예외 없었다. 당초 군경이 파악했던 무장대는 불과 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무려 3만명을 희생시켰다.

제주 4·3이 세상에 전라(全裸)를 드러낸 것은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가 발간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을 대표해 공식 사과하면서다. 2004년 박근혜 정부는 4월3일을 국가지정 추념일로 지정했다. 제주도의회는 최근 4월3일을 지방공휴일로 지정했다.

오는 4월3일 제주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서는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릴 예정이다. 이날 오전 10시에는 전도에 추념 사이렌이 울린다. 도민들은 이 행사를 준비하며 저마다 동백꽃 배지를 달았다.

양윤경 4·3 유족회장은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당시를 회고한다.

“70년 이란 시간이 어떤 시간이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견딜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부모 형제가 국가 권력에 의해 처참히 희생되었고, 집이 불타고 인권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참혹함 속에서 어떻게 견디어 왔는지는 말로 형언 할 수 없다. 과연 제주가 같은 나라였는지 제주도민이 같은 나라의 국민이었는지 되묻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국가의 책임을 촉구하고 진정한 명예회복의 목표를 향해서 함께하고 있음은 산자들의 몫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