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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②이화림은 누구…독립운동 위해 이혼도 불사한 투사

1919년 15세에 친구들과 3·1운동 참여
1930년 독립운동 위해 中상해로 망명
1931년 김구가 만든 한인애국단 합류
이봉창·윤봉길 거사 숨은 조력자 역할
독립 위해 이혼, 10년간 中서 항일 운동

등록 2019.02.27 06:00:00수정 2019.02.27 14: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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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1938년께 중국 중경에서 활동하던 이화림의 모습. (사진=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서울=뉴시스】 1938년께 중국 중경에서 활동하던 이화림의 모습. (사진=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던진 뒤 일제는 더 집요하게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였다. 김구가 조직하고 윤봉길이 속했던 한인애국단도 사실상 해체됐다. 거사(巨事)를 함께했던 이화림(1905~1999)도 일제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고자 그해 여름 곧바로 광저우로 넘어갔다. 독립운동에 힘을 보탤 방법을 찾던 이화림은 간호학을 배우기로 하고 중산대학 간호학과에 입학한다. 의열 투쟁과 또 다른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곳에서 이화림은 결혼했다. 남편은 같은 대학 유학생 김창국이었다. 아들도 낳았다. 더이상 그에게서 열혈 독립운동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이화림은 그저 평범한 주부였다.

1935년 늦가을. 항일무력독립운동단체 조선의열단 출신 윤세주(1900~1942)가 광저우에서 조선민족혁명당 당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윤세주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이화림은 그의 연설에 감화돼 다시금 조국 독립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남편은 강하게 반대했지만, 이미 마음을 돌린 이화림을 말릴 수 없었다. 그는 이혼했고 아이마저 남편에게 맡기고 조선민족혁명당을 따라 난징으로 떠났다.

'이화림 회고록'을 번역한 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아마 자기자신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있었을 거다. 독립운동을 하려고 국경을 넘었는데, 지금은 평범한 삶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자신이 싫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실제로 이화림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국 독립을 열망했던 사람이었다.

1930년, 평양에 살던 이화림은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이유는 단 하나. 독립운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백범(白凡) 김구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화림은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을 하려고 무작정을 국경을 넘었다. 1919년 15살의 나이에 친구들을 이끌고 3·1운동에 합류해 만세를 불렀던 그에게 일제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김구는 이화림이 여성이라는 점, 게다가 사회주의자라는 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독립을 향한 그의 열망을 보고 한인애국단에 합류하는 걸 허락했다.

【서울=뉴시스】 말년의 이화림. (사진=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서울=뉴시스】 말년의 이화림. (사진=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이화림은 한인애국단의 핵심 3인방 중 한 명이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봉창의 1932년 1월 일본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 투탄의 조력자 역할을 했던 게 이화림이었다. 그는 이봉창이 폭탄을 가랑이 사이에 숨겨 일본 천황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끔 주머니를 만들어줬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해 홍커우공원 투탄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것도 이화림이었다. 그는 윤봉길과 함께 공원을 정찰하고 잠입을 도왔다. 사실 이화림은 윤봉길과 함께 폭탄을 던지기로 돼 있었으나 거사(巨事) 직전 김구가 작전을 바꿨다. 일본어가 어설픈 이화림이 검문에 걸리기라도 하면 모든 작업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윤봉길 혼자 일을 치르라는 것.

이화림은 훗날 당시 일에 관해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때 윤봉길이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는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일본놈들이 마치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지."

난징으로 간 1936년부터 1945년 해방이 있기까지 약 10년 간 이화림의 삶은 오로지 독립운동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렇게 그는 조국을 위해 중국 전역을 떠돌았다. 난징에서 이화림은 조선민족혁명당 부녀국 의료보건사업 등을 맡았고, 김원봉의 부인 임철애(본명 박차정)와 함께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난징에서 이화림은 윤세주 등의 소개로 재혼하기도 했으나 이내 다시 헤어졌다.

난징대학살 등 일본의 중국 내륙 침략이 노골화하자 1938년 이화림은 이번엔 충칭을 거쳐 우한으로 이동했다. 같은 해 10월 우한에서는 조선의용대가 창설됐다. 조선의용대는 좌파 연합인 조선민족전선 연맹 산하의 무장 대오로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한인 군사조직이었다. 민족의 반일 역량을 총결집해 국외에서부터 '민족혁명전쟁' 을 수행하겠다는 원대한 목표 아래 출범한 것이다. 이화림은 조선의용대 부녀대 부대장을 맡았다. 대장은 임철애였다.

1940년 조선의용대는 진정한 항일 투쟁을 위해 화베이 타이항산에 있는 팔로군 항일 근거지로 이동하기로 하고 이듬해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화림도 당연히 이 흐름에 합류했다. 이화림은 이후 화베이와 옌안 등에서 해방을 맞을 때까지 항일 운동을 이어갔다.

이렇게 젊은 시절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친 이화림이 여지껏 훈장 하나 받지 못한 건 역시 해방 이후 활동 때문이다.

사회주의자였던 이화림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인민해방군의 지시로 조선인민군 제6군단 위생소 소장으로 복무했다. 의료 복무 중 미군 폭격에 부상을 입은 그는 요녕성 심양으로 복귀한 이후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중국에 남아 심양의사학교 부교장, 중공고급당교 수학, 중국 교통부 위생기술과 간부,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국 부국장과 주의 당대표를 맡았다. 문화대혁명 때 반혁명분자로 몰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복권 이후 대련으로 옮겨 요양했다. 대련에서 우리 민족을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다가 1999년 2월10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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