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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언어독감 발병"…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

등록 2017.12.09 14: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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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언어독감 발병"…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사람들이 왜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우리는 다른 이들의 마음에 연결되려고 책을 읽는 거야. 하지만 제 삶의 번드르르한 잡동사니들을 묘사하느라, 소위 '글을 쓰느라' 바쁜데 왜 책을 읽겠어? 자기가 뭘 먹는지, 얼마나 추운지, 글쎄 모르겠구나, 축구경기가 져서 속상하다고까지 강박적으로 하나하나 기록하는 것. 모두의 귀로 흘러들어가는, 그러나 또 누구에게도 흘러들어가지 않는 그 끊임없는 홍수. 현재를 따라가기도 힘든데 누가 구태여 과거를 들여다보겠니? 그러나 우리에겐 과거가 필요하단다."(490쪽)

미국 작가 앨리너 그래이든의 데뷔 소설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이 국내 번역·출간됐다.

세계적인 출판사 크노프에서 편집자로, 미국 작가 연대인 펜 아메리칸 센터에서 문학상 담당자로 일하던 그래이든은 이 소설을 탈고하기 위해 퇴사를 선택했다.

'밈: 언어가 사라진 세상'은 언어의 왜곡으로 인한 몰락과 그로 인한 폐해를 실로 섬뜩하고도 기괴한 방식의 미스터리로 풀어낸 작품이다.

곧 다가올 어느 날, 사람들은 '밈'이라는 최첨단 스마트기기에 자신의 삶을 몽땅 맡긴 채 살아간다. 그들은 손으로 글을 쓰기는커녕 더 이상 이메일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명령하면 밈이 알아서 해주는 편리한 세상이다.

자신의 생각을 읽고 실행해주는 편리한 밈으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더 단어를 잘 떠올리지 못하게 되지만 걱정할 건 없다. 어떤 단어인지 기억하려고 애쓰기만 하면 밈이 앞뒤 맥락에 맞게 적절한 단어를 찾아주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워드익스체인지'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사람들이 자주 잊는 단어들이 워드익스체인지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비'라는 단어를 떠올렸지만 워드익스체인지와 연동한 밈은 ‘슈릅바’라는 단어를 제시하고, 난생처음 보는 단어지만 뜻까지 알려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사소통에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엉뚱한 신조어로 기존의 단어들이 바뀌어가던 어느 날 치명적인 '언어 바이러스'가 발병해 세상은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또 어떤 이들은 역사는 직선이 아니라, 둥그런 원이어서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말해. 우로보로스, 영원한 순환. 그러나 우로보로스는 단순한 원이 아니라, 제 꼬리를 먹는 뱀이지. 바로 지금 언어를 불태워 죽이는 동안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우리는 퇴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때 우리의 생존에 유용했던 기술은 화면의 반짝거리는 점들을 찾고, 팝업창과 빔과 이메일과 비디오 스트림을 훑어보는 쪽으로 적응해가고 있어. 사고는 평면화되고, 진보는 기계로 넘겨졌지. 그런 일이 더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129쪽)

인간이 사고 기능을 스마트기기에 너무 많이 넘겨준 세상이 서서히 붕괴되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또 정확히 무엇이 '언어 독감'을 유발했는지, 그것이 어떻게 퍼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설정이 작가의 탁월한 필력에 의해 설득력 있게 묘사된다.

그럼에도 작품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언어로밖에 전해질 수 없는 사랑 그 자체다. 황근하 옮김, 520쪽, 검은숲, 1만5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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