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6·4 지방선거]경기도지사 당선인 남경필은 누구?

등록 2014.06.05 07:08:12수정 2016.12.28 12:52:11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수원=뉴시스】유명식 기자 = 민선 6기 경기도지사 남경필(49) 당선인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젊은 스타 정치인'이다.

 1965년 용인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경복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예일대학교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정치 입문은 1998년 3월 아버지 남평우 전 국회의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계기가 됐다. 남 당선인은 그해 7월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아버지 지역구였던 수원 팔달에 출마해 당당히 승리했다. 그때 나이가 만으로 31세였다.
 
 당선 인터뷰에서 그는 "새로운 변화와 깨끗한 정치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의 뜻을 받들어 희망찬 21세기를 열어가는 데 앞장서겠다"며 중앙 정치권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원조 소장파 '외로운 길'

 남 당선인은 2년 뒤 16대 총선에서도 무난히 재선에 성공,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를 결성했다. 공동대표를 맡으며 정병국, 원희룡, 오세훈, 김부겸, 김영춘 의원 등과 한나라당의 쇄신과 개혁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는 당 대변인으로 발탁돼 이회창 당시 후보를 가까이서 보좌하며 잠시 '주류'에 발을 담갔으나 패배에 쓴잔을 마셨고 결국 이후부터 비주류 소장 개혁파의 외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남 당선인은 자신의 저서 '시작된 미래'에서 "제가 믿었던 것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 제가 시대정신이라 믿었던 것이 국민이 원하는 시대정신이 아니었다는 사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그의 소장파 활동도 순탄치 않았다. 당의 개혁을 부르짖을 때마다 선배 의원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정치를 얼마나 안다고 입문한 지 얼마 안돼 섣부르게 개혁을 주장하느냐'며 당내 일부에선 그를 '오렌지'로 비꼬기도 했다. 사업가이자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 덕을 보며 고생을 모르고 자란 애송이 정치인으로 깎아내린 것이다. 남 당선인은 그때마다 "그냥 오렌지가 아니라 '나누는' 오렌지이고 싶다. '국민을 생각하는' 오렌지가 되고 싶다"며 쇄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지난 17대 3선에 성공한 뒤로는 국회 새정치수요모임을 이끌며 쇄신파의 학구열에 불을 붙였고 2008년 이명박 정권 초창기에는 18대 국회의원 공천을 앞두고 이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부의장을 직접 찾아가 총선 불출마를 직언해 정권으로부터 가족이 불법 사찰을 받는 고통도 받았다.

 남 당선인은 정치인으로서 여러 차례 뼈아픈 패배도 맞봤다. 2007년 7월 당내 소장개혁파 의원 연대인 '미래모임'의 당 대표 단일후보 경선에서 재선의 권영세 의원에게 졌고 2010년 7월 전당대회에서는 쇄신파 정두언 의원과의 단일화 경선에서 패했다. 2012년에는 19대 첫 원내대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고도 결선에서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는 "개혁소장파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당권을 넘볼 좋은 기회였으나 아깝게 주류의 견제로 패배했다"며 "당내 개혁소장파의 연대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패배였다"고 평가했다.

 ◇도백의 꿈을 품다

 남 당선인이 도지사직에 처음 도전한 것은 17대 국회의원 시절. 그는 민선 4기인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내 경선에 출마했다가 경쟁자였던 당시 김문수 의원에게 후보직을 과감히 양보했다.

 여론조사에서는 김 의원과 엎치락뒤치락하며 경쟁을 벌였지만, "김문수 의원이 훨씬 도지사직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양보한다"며 2선으로 물러나 승리를 위해 뛰었고 그는 민선4기 경기도지사직 인수위원회 인수위원장을 맡았다.

 김문수 도지사가 재선에 도전한 2010년을 건너뛴 남 당선인은 지난 1월 당내 '중진 차출론'에 고심을 거듭했다. 다시 '원내대표' 출마를 검토하고 있었지만,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당 안팎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다.

 남 당선인은 지난 3월 출마 선언을 하며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야 후보군을 모두 20% 포인트 이상 앞서며 절대 강자로 우뚝 섰다.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고비가 없지는 않았다.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정부·여당 심판론이 강하게 불면서 한때 새정치민주연합 김진표 후보에 오차범위 내이긴 하나 1위 자리를 내주는 등 고전했지만, '혁신', '개혁'이라는 개인의 아이콘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남 당선인은 세월호 비극 때 당내 경선을 앞둔 위급한 상황임에도 12일 동안 진도 현장에 내려가 있었다. 그는 '수첩'에 빼곡히 적어뒀던 현장 행정의 '밑그림'을 이제 경기도라는 도화지에 옮겨 그릴 참이다.

 남 당선인은 "정치인으로 가졌던 소신과 가치를, 정책적 아디디어를 도민 속에서 도민과 함께 실천하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개구쟁이' 학창시설…그리고 '가족'

 용인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남 당선인은 수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수원에서 시골 소년으로 자라던 시절, 그저 친구들과 놀리 좋아하는 개구쟁이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웃집 어디든 들어가 밥을 얻어먹을 정도로 낯가림이 없었다고 했다.

 남 당선인은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으며 1급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있다. 대학 시절 만난 가수 안치환을 두고는 "사회문제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던 저와는 달리 치환이는 훨씬 생각이 깊었다"며 "그는 속속들이 민중의 아픔을 느끼는 데 비해 유복하게만 자란 저는 그렇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졌다"고도 했다.

 대학 졸업 뒤에는 3년간 아버지가 사주(社主)로 있던 지방지에 입사해 사회부,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미국 예일대로 유학을 떠나 경영학 석사과정을 이수했고 뉴욕대에서 행정학도 공부했다. 그는 예일대 시절 한인 학생회장을 맡아 정치인생의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 또 운전면허증 발급받으면서 장기기증에 서약, 국회의원이 된 뒤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장기기증 캠페인 등에 노력했다.

 그의 땀방울은 우리나라에서도 운전면허증에 장기기증의사 표시할 수 있도록 '2007년 도로교통법시행령 개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남 당선인은 독단적인 결정 없이 주변의 다른 이야기와 목소리를 경청하는 장점이 있다고 참모들은 입을 모은다. 이번 선거기간 "격의 없이 토론하고 소통했다"고 했다. 문자와 카톡을 주고받는 '스마트' 한 신세대 정치이기도 하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군 복무 중인 아들이 둘 있다.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