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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아트클럽] 권옥연 4주기…이병복 여사 "그림 보이는걸 왜 그리 불안해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아"

등록 2015.12.11 10:01:44수정 2017.11.14 11: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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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미완성으로 남은 권옥연, 무제.

【서울=뉴시스】미완성으로 남은 권옥연, 무제.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생(生)과 사(死) 사이에는 후회만 있다.

 "녹음이라도 해놓을 껄. 에휴~"  원로 무대미술가 이병복(88·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여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땐 TV를 켜놓고 집이 떠나가라 노래를 불러서 정신병자라고 했어요"

 큰 딸인 화가 권이나(61)도  그 말을 거들었다. "그림을 그릴때건 언제나 늘 TV를 끄지를 않았어요. 주책처럼 깐소네를 테너 흉내를 내면서 부르시는데, 굉장히 잘했어요. 그런데 그 육성을 녹음한 게 없네요. 그래서 참 아쉬워요"

 파리에 사는 딸이 엄마와 한 자리에 앉은 건 그렇게 노래를 부르곤 했던 아버지 권옥연(1923~2011)때문이다. 권옥연의 대를 이어 그림을 그리는 딸 권이나는 '엄지 손가락' 조각가로 유명한 세자르의 수제자로도 유명하다.

 타계한 지 올해로 4주년, 권옥연 화백의 묵직한 그림이 세상에 다시 말을 걸고 있다.

 가나문화재단(이사장 김형국)이 사후 첫 대규모 회고전을 마련했다. 11일부터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권 화백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다. 1950년대부터 2000년대 미완성 작품까지 총 50여점을 선보인다.

 권옥연은 한국 추상미술 1세대이자 초현실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미술계에서 음악을 사랑한 '멋쟁이 화가'로 유명하다. 기골이 장대한 '상남자'스타일이지만 흥이나면 어디서건 노래를 부르는 로맨티스트였다. 특히 청회색조의 애수에 찬 그림은 그를 더욱 신비롭게 했다.

  생전에 그는 '구라파 가수'였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날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한 그에게 "안경때문인지 멋지다"고 하자, "리어카에서 1만원 주고 산 것"이라며 기분이 좋아진 그는 안경을 한쪽 손에 들고 즉석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제껴 웃음을 선사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서울=뉴시스】이병복 여사가 권옥연 화백의 작업실을 재현해 전시장에 선보인다.

【서울=뉴시스】이병복 여사가 권옥연 화백의 작업실을 재현해 전시장에 선보인다.

  "그이는 평생 '다섯살 아이'로 살았어요"

 이병복 여사는 "남편으로 빵점 이하였다"면서 원망같은 그리움을 쏟아냈다. "어떤 남자였냐고?. 영원히 내 차지도 아니고, 남편인지, 동거자인지, 애기아버지인지… . '그이', '그 사람'밖에는 안되요" 

 옛날 일이 생각난 듯 정색을 하던 이 여사가 말을 이었다. "어느 날 선언을 하더라고요. 여보, 난 다섯살이야. 다섯살 넘으면 그림 못 그려.어휴 그걸 자랑이라고 해?. 그렇게 '에고'(ego)를 부렸어. 작업실에도 얼씬 못하게 했어"

 낭만파 '멋쟁이 화가'의 반전이 드러났다. "작업실은 그야말로 쓰레기장이야. 아마 쓰레기통도 그런 쓰레기통이 없을 걸. 작업실에 오솔길이 생기다가 3년이면 포화상태가 돼. 청소를 안해서 쥐도 돌아다니고, 냉장고엔 곰팡이도 피어있더라고."

 청소도 소용없이 된 작업실은 3~4년마다 옮겼다. 새로 이사간 화실엔 가족도 못오게 했다. "그렇게 그림보는 걸 자신 없어하고 불안해하고,남한테 뵈는 걸 싫어하더라고. 그때는 자존심 상해서 (작업실)에 가고 싶지도 않았어요"

 "한 스무번은 이사를 했을거야. 내가 60년의 세월을 그렇게 살았어."

 권 화백은 함흥 권진사댁 5대독자였다. 어릴적 조부로부터 서예를 배웠고 바이올린에 심취한 부친을 통해 음악적 영감을 익혔다. 그래서인지 권 화백의 작품은 동양적인 깊이감과 음악적인 리듬감이 융합되어 중후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독창적 화풍을 이뤘다는 평가다. 고흐의 작품을 보고 '딱 고흐다', 이건 '박수근 작품이다'라고 하는 것 처럼 청회색조의 색만 봐도 '권옥연이다'고 할 정도다.

【서울=뉴시스】쓰레기장 같은 화실을 처음 공개했던 2010년의 권옥연 화백.

【서울=뉴시스】쓰레기장 같은 화실을 처음 공개했던  2010년의 권옥연 화백.

함축적인 자연풍경의 소재부터, 일상의 정물이나, 이국적인 여성상 그리고 추상까지 다양한 조형세계를 선보였다. 특히 중간 계열인 청색, 회색, 녹색 등을 여러 번 덧칠해 절제된 색감과 상념에 빠진 듯한 인물화로 유명하다.

  저음이 잦아드는 억제된 화면이다. 그는 스스로 색을 누르려 애썼다.  암회색, 녹회색·청회색으로 덮여 있는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알 수 없는 진한 슬픔이 파고든다.  생전 인터뷰때 그는 "전쟁을 겪고 비극적인 시대를 살아낸 탓일까. 그러고 보면 난 구식"이라면서 "요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왜 대담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었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에서 처음 미술을 접하고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42년 일본으로 가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1957년에 이병복 여사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이 여사는 당시 일본에서 물감을 잔뜩 사서 파리행 비행기를 타던 시절을 기억해냈다. "그땐 내가 건방진 여편네였어. '한국의 피카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

  돈이 없을때니까 주머니 많은 바바리코트에 물감을 사서 넣을대로 넣었다. 무거워서 입기도 걷기도 힘들어 들춰메고 공항대에 섰다. "결국 세관에 걸려 그 바바리를 안고 사무실까지 들어갔는데 사정을 들은 관리가 열심히 공부하라며 그냥 보내줘 비행기를 탈수 있었지."

 "남편은 뭐하고 있었냐고?. 저 멀리서 딴청을 피던 인간이 비행기를 타니까 '와 진짜, 간다~'며 만세까지 부르더라고. 그게 남편이라는 사람이에요. 에휴 말해 뭐해~"

  파리 아카데미 뒤 페에서 공부하던 권화백은 상징주의, 후기인상주의, 앵포르멜, 초현실주의 등 동시대의 주요 미술사조를 접했다. 당시 권위있는 추상미술전이었던 레알리떼 누벨에 초대되기도 했다. 문학적 은유와 음악적 선율이 숨쉬는 그의 작품을 두고 초현실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은 "당신이야말로 진정을 현실을 넘어섰다"며 "동양적 쉬르알레리즘"이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브르통이 제안한 파리 개인전을 뒤로한 채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 곁을 지켜야 한다는 장남의 책임감이었다. 1960년 38세에 귀국한 그는 국내외에 전시에 참가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국전에 추천작가에서 파리, 도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초대된 'K-아트' 원조다. 당시 절제된 색채를 바탕으로 한 풍경과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명백한 구상형태의 인물화지만 지칭하는 대상이 없는 그림 속 인물들은 그의 추상화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권옥연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서울=뉴시스】부인 이병복 여사를 모델로 한 권옥연의 여인상. 1951

【서울=뉴시스】부인 이병복 여사를 모델로 한 권옥연의 여인상. 1951

이번 전시에는 이 여사가 직접 권화백의 작업실을 재현했다. 60년만의 정리다.  '쓰레기장 같던 작업실'은 말끔해졌다. "사진을 보면서 상상하면 돼요" 이젤과 의자, 물감, 굳어진 붓들, 그리다 만 그림들을 그대로 가져다놓았다. 벽에는 40대의 늠름하게 서있는 권화백 사진을 인쇄해 붙였다.

 이 여사는 그가 '에고'를 부린 것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림밖에 모르는 그 철저함이 부럽고,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고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1/10 일이라도 닮아야 하는데 안되는 거는 안됩디다."

 같은 예술가로서 부러웠다. "존경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면서 이걸로 버텨왔다"고 했다.

 무대미술가 1세대인 이병복 여사는 무대미술과 의상을 하나의 예술로 끌어올린 연극계 원로다. 1966년 극단 '자유'를 창단해 100여 편의 작품을 공연했다.

 옆에 있던 딸 권이나 작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평소 대사를 끄집어냈다. 어머니가 먼저 "그것도 그림이야?"라고 샐쭉하면, 아버지가 맞받아쳤다. "연극? 난 창피해서 초대장도 아무한테나 못줘~" 티격태격,서로의 작품세계를 칭찬하기보다 빈정대기 일쑤였다.

 이 여사는 "우리는 서로 작품을 봐주면서 냉정했다"며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고, 나중에 생각하면 맞는 말이란 말이죠. 그래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살았나보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이 일치한건 남양주에 세운 '무의자박물관'이다. 40대부터 허물어가는 궁집과 한옥 9채를 매입해 조성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화끈한 민족입니까. 우리도 보따리 안싸들고 우리공간에서 우리 정체성있는 무대도 만들고 공연도 하고 전시도 하는 복합문화공간을 꾸민 것인데, 남편이 뚝 떠나, 이제 자식들에게 짐으로 남겠됐어요."  2011년 11월 '무의자문화재단'을 출범시켰지만 이루지 못한 꿈이 됐다. 권화백은 그 한달후 12월 16일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여사는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남편이 왜 그렇게 그림을 남한테 보이기 싫어했는지를" 알게 됐다.

【서울=뉴시스 청회색, 암갈색의 소녀, 여인상 소품들이 전시장에 걸렸다.

【서울=뉴시스 청회색, 암갈색의 소녀, 여인상 소품들이 전시장에 걸렸다.

"얼마나 부담스럽고 두렵고 겁나고 그랬을까. 이제사 그 의미를 알수 있을 것 같아요. 저야 무대 뒤에서 기어다니면서 죽을 판 살판 일을 끝내고 막이 내리면 때려부셔서 모든게 폐기물이 되는데, 물론 다시 보이지를 못하니 불행하기도 하지만 엄격한 두 눈동자로 보는 사람들앞에 안나타날 수 있는게 다행스럽기도 하네요."

 별세하기 1년전 기자와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권화백은 "그림 그리는게 무섭다"고 했다. 미술시장에서 명품으로 인기가 있던 시기로, 그림값은 호당 500만원이 넘었다. '여인' 인물화 소품은 현재도 2000만원선을 웃돌게 팔리고 있다.

  주머니에 늘 붓펜을 가지고 다니던 그는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추사 김정희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추사는 정말 완벽한 예술가"라면서 "내게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감성을 키워준 정신적인 멘토"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전했다.  "파리에 유학해서 그림 그리다가 답답할 때면 슬라이드로 만들어간 추사 글씨를 환등기로 비춰보곤 했지. 추사 글씨는 공간 배열, 글씨의 획 하나하나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완벽한 조형언어야. 그 자체가 이미 완벽한 그림의 요소를 갖추고 있지. 아마 내 그림에도 그런 영향이 스며 있을 거야."

 그는 말하면서도 백지에 '無衣子(무의자)'를 습관처럼 쓰곤 했었다. 그의 호였다. '無衣子'라는 호는 그의 거짓없고 일관된 삶을 그대로 전한다. '벌거벗은 아들'이라는 뜻의 호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어 거짓없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명성보다는 예술에 헌신했다. 2001년 79세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로 선정됐고, 82세에 마니프 대상을 수상했다. 2009년 한국미협 ‘올해의 미술상’ 명예공로상을 수상했지만 함께 수여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은 끝내 고사한 일은 미술계에 회자되고 있다.

 천진난만한 아이같고, 한량처럼 보이다가도 우울함과 쓸쓸함이 감돌았다.  마지막이 된 2010년 인터뷰때 슬퍼보인다 하자 "자식을 앞세운 슬픔은 이루 말할수 없다. 어떤 슬픔과도 비교할수 가 없다"며 먹먹한 속내를 처음으로 털어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이 여사는 "며칠전 눈보라가 대단했을때 테라스에서 한창을 울었다"고 했다.  "우리 아들 세상 떠나기전 날씨가 그랬거든요. 이 에미하고 아버지밑에서 기 한번 못 펴고, '두 권력밑에 깔려서 기 한번 못폈다' 그렇게 절실하게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휙 들었거든요. 아버지 추모전 한다고 하니까 온 것 같아서. 유난스런 부모 만나는 것도 자식팔자고....19년 정도 됐네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던 이 여사가 다시 힘을 내 말했다. "그래도 화가는 좋다. 죽고난 후에도 좋든 나쁜든 자기 작품이 한자리에 모여서 전시가 되니까 그런 기회를 가질수 있다는게 참 부럽네요"

 차분한 청회색의 풍부한 질감과 세련된 풍미가 돋보이는 권옥연 회고전을 여는 가나문화재단은 '권옥연 화집'도 발간할 계획이다. 단색화 이후 다시 봐야할 명작으로 꼽힌다.

 개막일인 11일 오후 5시, 이병복 여사는 남편의 회고전을 위해 씻김굿과 살풀이춤 공연을 펼친다.  2016년 1월 24일까지.02-720-1020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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