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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재의 크로스로드]다국적기업의 조국(祖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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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7-03-06 18:06:48  |  수정 2017-03-07 14: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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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이유로 외국기업 제재
자유 무역을 철저히 부정하고
국제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려
상대방과 자신도 해치고 말아  

【서울=뉴시스】정문재 부국장 겸 미래전략부장 = 테트라에틸납(TEL)은 VX만큼이나 치명적인 화학물질이다. 증기 혹은 액체 상태의 TEL을 흡입하면 경련이나 환각에 시달리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 VX와는 달리 TEL은 아직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항공유의 연료 효율을 크게 높여주기 때문이다.

 TEL은 뛰어난 노킹 방지 효과를 자랑한다. 노킹 현상을 해결하지 못하면 정상적인 항공기 운항이 불가능하다. 출력 저하는 물론 엔진 파손을 일으킨다. 원거리 비행은 꿈도 꿀 수 없다. 

 스탠더드오일(Standard Oil)과 제네럴모터스(GM)는 1923년 TEL 생산을 위해 '에틸(Ethyl)'이라는 화학업체를 합작 설립했다. 에틸은 전세계 곳곳에 TEL을 판매했다. 제2차 세계대전기간중 에틸은 특수(特需)를 누렸다. 에틸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진영은 물론 독일 등 추축국 동맹에도 TEL을 공급했다.

 독일 공군은 에틸 덕분에 영국 하늘을 제집처럼 누비고 다녔다. 에틸이 TEL을 공급하지 않았다면 원거리 군사 작전은 불가능했다. 독일의 화학·의약업체 'IG 파벤'은 전쟁 기간 내내 에틸로부터 TEL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에틸의 TEL 공급은 명백한 이적행위였다. 하지만 스탠다드오일과 IG 파벤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양측은 투자 및 경영 제휴를 통해 세계 석유화학시장을 쥐락펴락했다.

 IG 파벤은 스탠더드오일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IG 파벤은 1951년 아그파(AGFA), 바스프(BASF), 바이엘(Bayer), 사노피(Sanofi) 등 4개사로 분할됐다. 모두가 글로벌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화학·의약품업체다. IG 파벤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IG 파벤에 좋은 것은 스탠더드오일에도 좋았다. 스탠더드오일은 미국, 베네수엘라, 루마니아 등지에서 유전을 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지만 스탠더드오일은 IG 파벤과의 협력에 힘입어 루마니아 유전의 재산권을 지켰다.

 스탠더드오일은 IG 파벤을 통해 TEL뿐 아니라 석유를 나치 독일에 대량 공급했다.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된 석유를 스페인령 카나리아제도로 운송한 후 독일 유조선에 옮겨 실었다. 원활한 항공유 생산을 위해 카나리아제도와 독일 함부르크에 정유공장까지 세웠다.

 스탠더드오일의 대주주 존 록펠러(John Rockefeller)의 조국은 미국이다. 하지만 스탠더드오일의 조국은 미국만이 아니다. 석유를 개발, 정제하고, 판매하는 곳이 스탠더드오일의 조국이다. 그게 다국적기업의 속성이다.

 스탠더드오일만 그랬던 게 아니다. 포드(Ford) 등 상당수 다국적기업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군수품을 공급했다. 이들은 그저 매출 및 이익 확대에 주력했다.

 다국적기업은 국가권력과 긴장 또는 길항 관계를 유지할 때가 많다. 전시는 물론 평화로울 때도 마찬가지다. 존재 이유가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이 다국적기업에 브레이크를 걸 때도 많지만 때로는 국가권력이 왜소해진다. 레이몬드 버논(Raymond Vernon) 하버드대 교수는 이런 흐름을 '궁지에 몰린 주권(Sovereignty at Bay)'이라고 표현했다.

 국가권력과 다국적기업은 주로 경제적 문제 때문에 갈등을 빚는다. 일부 유럽국가들은 시장 개방 확대와 함께 복지정책도 큰 위협을 받을 것으로 우려한다. 다국적기업이 자국에서 매출 및 수익을 늘리면서도 조세 회피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부담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외국기업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도 생산시설 유치를 통한 미국의 고용 확대를 위한 것이다.

 반면 자유무역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유로 다국적기업을 못살게 구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이라면 이런 제재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중국은 2001년 꿈에 그리던 WTO에 가입했다. WTO 가입을 위해 충성을 맹세하듯 '무역자유화 적극 지지'를 다짐했다. 중국은 WTO 체제의 최대 수혜자로 꼽힌다. 중국의 고속 경제성장은 자유무역에 힘입은 바 크다.

 중국 정부의 최근 행태는 상식 밖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드 배치를 이유로 다국적기업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국제규범에 어긋난다. 다국적 기업이 자국(自國)의 고용 및 경제적 후생 확대에도 기여한다는 점에서 이런 규제는 자해행위나 다름없다. 

 중국은 다국적기업에 대한 정치적 제재로 이미 큰 것을 잃었다. 바로 국제사회의 신뢰다. 패권을 위해 국제규범을 얼마든지 무시하는 국가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사적(私的) 생산을 용인하면서도 포괄적인 국가 통제를 당연시하는 '파시즘(Fascism)'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파시즘 아래서는 경제적 번영은 지속될 수 없다.

참고문헌

1) Higham, Charles. Trading with the Enemy. 2007. iUniverse. 
2) Gilpin, Robert. Global Political Economy.2001.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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