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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기자 사냥터' 방불케 한 탄핵 선고일 집회 현장

등록 2017.03.14 08: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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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서울=뉴시스】이혜원 기자 = "야 이 XXX아, 너 기자야? 나가 XXX아! 꺼지라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있었던 지난 10일. 헌법재판소 인근인 서울 안국역 5번 출구 일대는 '사냥터'를 방불케 했다. 선고 결과에 불복한 성난 군중은 눈에 불을 켜고 기자들을 색출해 쫓아냈다. 폭행과 폭언도 만연했다.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 집회 장소는 오열과 고함, 욕설로 가득 차 있었다. 성난 군중들은 경찰 버스와 시설물을 부숴댔다. 경찰버스는 창문은 물론 문까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됐다. 경찰들 사이에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때보다도 더 심하네"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아수라장 같은 현장에 정신이 나가 있던 중 욕설 섞인 고함이 들렸다. 여성을 상대로 한 욕 중 최고 수위에 속하는 비속어였다. 기자보다 두배는 훨씬 더 살았을 그 남성은 욕설과 함께 태극기로 손등을 세게 내리치며 "여기서 꺼지라"고 소리쳤다. 주변 사람들도 가세해 "빨리 꺼져"라면서 기자를 마구 밀쳤다. 아무도 폭행을 막아주지 않았다.

 그 때는 정광용 탄기국 대변인이 연단에서 "거짓 기사 한 줄이라도 썼던 모든 기자들에 대해 색출 작업에 들어갑니다"라고 외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집행부 지시에 따라 참가자들은 전쟁터 용병처럼 기자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밀어대는 건 물론 일부는 기자들을 향해 무기까지 휘둘렀다.

 폭력은 경찰 버스에 밧줄을 묶어 끌던 차벽 인근에서 격화됐다. 참가자들은 카메라를 든 기자라면 가리지 않고 폭행했다. 기자 한 명 주위를 십여 명이 둘러싸 욕하며 밀치는 상황에 기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무사한 건 외신기자 뿐이었다. 기자 신분을 감추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어보지만 젊은 사람을 발견하면 다가와 "기자야?" 하고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었다.

 검열도 일삼았다. 현장 상황을 시시각각 휴대전화에 담고 있던 중 한 30대 남성이 다가와 "기자냐"며 내용을 보자고 했다. 선글라스를 껴 얼굴 노출을 최대한 가린 참가자였다. 사적인 대화라 보여줄 수 없다고 하자 "취재와 상관없는 얘기 중이라면 당장 나가라"고 했다. 취재 중이라고 하면 "기자는 썩 꺼지라"고 성냈다.

 이날 7시간 넘게 탄기국 집회 현장을 취재하면서 십수번 넘게 린치를 당했다. 참가자들은 기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발견하며 달려가 쫓아냈다. 취재 중 만난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의 남편 신동욱 공화당 총재는 "사람들이 화가 많이 나 기자들에게 가차 없다. 태극기를 들고 있어도 소용없더라"며 기자 손에 명함을 쥐어줬다. 사람들이 때리려고 하면 명함을 보여주며 본인 이름을 팔라고 했다. 신 총재 덕분에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길 수 있었다.

 성난 군중에게 당한 건 취재진만이 아니었다. 참가자들은 경찰 버스에 밧줄 대여섯개를 묶어 '영차영차'하며 끌었다. 버스 위에 모여 있던 의경들의 안전은 안중에 없었다. 버스 안에 있는 의경들을 향해선 작대기를 던졌다. 유리창은 이미 산산조각나 떨어져 나간 지 오래였다. 진압하는 경찰에게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정보 수집 중인 경찰 정보관에겐 "넌 뭔데 여기 있어"하며 밀어댔다. 경찰 신분을 밝혀도 막무가내였다. 신분증을 보여주자 "경찰이면 신분증을 달고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되레 역정을 냈다. 군중은 "여기 있는 경찰들 다 빨갱이다"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집회 참가자들의 절제 없는 분노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집회 현장에서 2명이 쓰러져 숨졌다. 한 명은 심장질환으로, 다른 한 명은 집회 참가자가 무단으로 경찰 트럭을 모는 과정에서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군중 사이엔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 퍼졌다. 소문이 돌고 이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 루머는 사실이 됐다.

 소문의 원천은 연단이었다. 사고 후 연단의 사회자는 "탄핵 인용과 동시에 흥분을 못 이겨 저 더러운 XX들을 잡아 죽이려다 버스 위에서 떨어졌다. 고인의 죽음이 헛되게 해선 안 된다"며 사고를 '의거'로 둔갑시켰다. 확성기를 통해 수천명에게 전달된 루머는 그렇게 '팩트'가 됐다.

 집회가 과격해지자 경찰이 집시법에 의거해 해산명령을 내려도 사회자는 "경찰이 의료사고를 우려해 거듭 강제 해산을 요구하고 있다. 우린 집회 신고를 자정까지 한 상태"라고 포장했다. 경찰 경고방송을 듣지 못한 채 사회자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참가자들은 집회를 해산시키는 경찰에게 "정당하게 집회하고 있는데 왜 강제로 쫓아내냐"며 역정을 냈다.

 언론인을 향한 적개심 역시 지난 태극기 집회에서 "언론의 가짜 뉴스로 박 대통령이 억울하게 탄핵됐다"는 연사 발언을 통해 기정사실화 된 정보에 근거한 분노였다.

 집회 참가자들이 박 전 대통령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에 집회에 나왔을 것이란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순정은 폄훼될 수 없지만, 뒤에서 '가짜 뉴스'로 이들을 조종하는 집단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언론과 공권력을 맹목적으로 공격한 데 대한 책임은 무기를 든 집회 참가자보다 실은 거짓 정보로 이들을 선동한 '보이지 않는 손'들이 져야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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