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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여성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하는' 것"

등록 2017.08.08 14: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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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여성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하는' 것"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현실이 없는 시는 없다. 그것의 치환, 병치, 은유, 환유, 회피, 현미경적 접근, 망원경적 접근, 현실의 표면에서 살짝 포를 뜨기, 뼈째 우려내기 등등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현실을 요리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병적 징후의 터널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러한 병적 징후들과 들어맞는 스타일의 느슨한 정합성이 아니던가. 진정성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의 골목길에 버려진 토사물들, 쓰레기들, 나의 시들."(77쪽)

시인 김혜순의 시론을 묶은 '여성, 시하다'가 출간됐다. 1979년에 등단해 12권의 시집을 펴내는 내내 김혜순은 남성 중심의 지배적 상징질서를 충실히 구현해온 언어에서 자신의 몸·말을 꺼내어 끊임없이 새로운 목소리로 확장시켜왔다.

김혜순의 시론은 그가 독창적이고 상상적인 언술로 갱신해온 한국 현대시의 미학이 도달한 지점이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가부장적 사회의 법과 문학적 보편성의 논리에 갇혀 해석되고 연출되고 박제되어온 여자의 몸, 여성시에 대한 본질적이고도 제대로 된 독법의 필요성과 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이 여성적 글쓰기의 원천과 욕망, 사랑과 숙명에 대해 절박하게 묻고 답했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2002)을 냈다. 이후에도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여성이 시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답하며, 나아가 여성시인과 작가의 목소리가 남다른 발성법과 언어 체계와 상상력을 지니고 있음을 구체적 문학적 사례(강은교, 고정희, 김승희, 김정란, 최승자의 시와 오정희의 소설 등)를 들며 입증해내는 길고 짧은 글 10편을 시론집 '여성, 시하다'에 묶였다.

"시인이란 어떤 존재들인가. 그는 현실 속을 달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외줄을 타는 사람이다. 시는 유리보다 투명하게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매체다. 모방하면 모방을 비추고, 눈 감으면 눈 감은 그를 비추고, 폼 잡으면 폼을 비춘다. 시에는 이 짧은 문장 안에 ‘나’라는 허구를 몽땅 구겨 넣어야 하는 이행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시는 표현의 발명이고, 미학적 현상이다. 부재의 설계도 내지는 투시도를 넘어선 부재의 건축이다. 시는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 세상 모든 것들이 지닌 생과 사의 무게를 슬쩍하여 무중력으로 만드는 것이다."(123~124쪽)

"시는 있음과 없음의 길항 속에서 파동으로 움직인다. 파동은 패턴을 갖기 마련이다. 패턴이 리듬으로 움직인다. 리듬은 사람이라면 모두 느낄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영혼 사이의 울림이다. 이 울림을 타고 시인의 삶이 누군가의 영혼을 친다. 그리하여 시는 메타포가 아니라 현전(現前)이다. 무언가 완성되는가 했더니 소멸하고 소멸하는가 했더니 다시 불길이 인다. 사물인가 했더니 사물 저편이다. 시는 단어와 단어의 만남, 그 파동을 통해 언어 속에서 수수께끼를 끌어낸다. 그 수수께끼의 지속적인 밀도, 그것이 시라는 것이다."(132쪽)

김혜순은 여성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같은 땅을 딛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지만 남성에 비해 늘 차별과 혐오, 폭력과 소외의 게토 상태에 노출되어온 여성·몸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유독 한국문학에서 여성시인의 언어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몸에 씌워진 배타적 억압과 구속을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타인의 편협한 이해를 요구받아왔다. 여성시인의 언어는 여성시인 스스로가 자신을 이방인, 난민으로 경험, 인식하는 것, 혹은 그에 따른 학습, 사유가 있지 않고는 발화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235쪽, 문학과지성사,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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