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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스 전 재무 "피셔 연준 부의장 사임은 한 시대의 종언"

등록 2017.09.08 12:44:46수정 2017.09.09 0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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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AP/뉴시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62) 하버드 대학 교수가 7일(현지시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 스탠리 피셔(73) 연방준비제도(연준, Fed) 부의장의 갑작스런 사임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올렸다. 서머스 교수는 “스탠리 피셔의 사임은 한 시대의 종언”이라고 규정했다. 피셔 부의장이 지난해 10월17일 뉴욕 이코노믹 클럽에서 연설하고 있다. 2017.9.8.

【뉴욕=AP/뉴시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62) 하버드 대학 교수가 7일(현지시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 스탠리 피셔(73) 연방준비제도(연준, Fed) 부의장의 갑작스런 사임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올렸다. 서머스 교수는 “스탠리 피셔의 사임은 한 시대의 종언”이라고 규정했다. 피셔 부의장이 지난해 10월17일 뉴욕 이코노믹 클럽에서 연설하고 있다. 2017.9.8.

【서울=뉴시스】박상주 기자 =  “스탠리 피셔의 사임은 한 시대의 종언이다(It is the end of an era).”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62) 하버드 대학 교수가 7일(현지시간) 자신의 블로그(http://larrysummers.com/)에 올린 글을 통해 스탠리 피셔(73) 연방준비제도(연준, Fed) 부의장의 갑작스런 사임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올렸다.

 서머스 교수는 피셔 부의장이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사제 인연을 맺었다면서 “40여 년 전 그의 제자였던 것은 하나의 특권이었다. 40여 년 동안 그의 친구였던 것은 하나의 기쁨이었다”라고 피력했다.

서머스 교수는 또 “연준 부의장으로 그만큼 존경을 받은 인물이 없었다. 그는 깊은 그리움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서머스 교수의 블로그 글의 요지.
 
 스탠리 피셔가 어제 연준 부의장직을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의 사임으로 연준과 국제 통화체제는 더욱 약해지게 됐다. 스탠리의 사임은 한 시대의 종언이다(It is the end of an era).

 스탠리는 두드러진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가 MIT 교수시절 절친인 루디 돈부시 교수와 함께 공동저술한 ‘거시경제학’은 한 세대 동안 그 분야의 기본 교교서로 받아들여졌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경제학자 올리비에 블랑샤르와의 공저 ‘거시경제학(Lectures on macroeconomics)’은 대학원생들에게 “예술의 경지(the state of the art)”로 규정되기도 했다.

 스탠리의 강의는 명쾌한 설명과 균형 잡힌 판단의 모델이었다. 나는 1978년 가을학기 그의 수업을 청강했다. 나의 화폐경제학에 대한 시각은 당시 형성된 것이다.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등 중앙은행계의 숱한 인물들은 단순한 학생들이 아니라 그의 사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스탠리는 단지 시작했을 뿐이었다. 스탠리는 MIT에서 세계은행(WB)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스탠리의 후임자로서 스탠리가 은행의 모든 이코노미스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는지를 볼 수 있었다.
 
 미국 재무부가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로 미셸 캉드쉬를 추천할 당시 나는 스탠리가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미셸과 캉드쉬는 1990년대 신흥시장의 금융위기 당시 아주 밀접한 파트너십을 형성했다.

 개발도상국의 모든 재무장관들은 IMF에 대해서는 양면적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피셔 교수에게만은 존경과 신뢰를 보냈고, 조언을 구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넘치게 충분한 업적이었다. 스탠리는 그러나 잠깐 동안 민간분야(시티그룹 부회장)에서 일을 한 뒤 이스라엘로 건너갔다. 그는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로) 정부 경제정책을 이끌면서 국제통화 무대에 족적을 남겼다.

 스탠리는 임무를 완수한 뒤 미국으로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그는 연준의 자리를 맡았다. 연준 부의장으로 그만큼 존경을 받은 인물이 없었다. 그는 깊은 그리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정의로운 세상이라면 스탠리는 연준 의장 혹은 IMF 총재를 맡았을 것이다. 운명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탠리는 지난 새대 동안 교육과 집필, 자문 등을 통해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수천 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노력 덕에 더 잘 살 수 있게 됐다. 40여 년 전 그의 제자였던 것은 하나의 특권이었다. 40여 년 동안 그의 친구였던 것은 하나의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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