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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재판석의 눈물, 그는 감정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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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7-11-23 17: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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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현섭 기자 = "피해자가 겪어야 할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며…"

 지난 10일 오전 서울법원종합청사 312호 중법정.

 서울고법 형사8부 강승준 부장판사는 '의붓손녀 성폭행 사건' 김모(53)씨에 대한 주문을 읽어내려 가고 있었다. 황색 수의를 입고 피고인석에 선 김씨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여느 판결 순간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 하지만 강 부장판사의 말투는 차분하고도 또렷했던 앞선 선고들과 달랐다. 수시로 떨렸고 말을 잇지 못했다.

 업무상 기계적으로 노트북을 두드리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방청석 뒷편에 앉은 기자의 눈에도 붉어진 강 부장판사의 얼굴색이 단번에 들어왔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꾹꾹 눌러가며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갈 곳이 없어진 11세 여자아이. 친할머니와 사실혼 관계에 있던 남성으로부터 의붓손녀가 당한 수차례의 성폭행. 미성년의 나이에 두 차례의 출산. 아무리 법관으로서 냉정한 판결을 내리는 순간이라도 갈기갈기 찢겨진 한 소녀의 인생을 떠올릴 땐 담담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 수 있다.

 이날 재판부는 김씨에게 1심 징역 20년을 파기하고 25년을 선고했다.
 
 이 재판은 뉴시스 기자를 비롯해 3명의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를 했다. 형량 가중이 아닌 강 부장판사의 눈물을 중심으로 기사를 작성했고 포털사이트 등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이후 기사를 본 몇몇 지인은 기자에게 "그래도 법관이 법정에서 감정적이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차분함, 침착함 등은 법관이 꼭 지녀야 할 기본 자질이자 덕목이다.

 하지만 법관의 판결은 단순히 범죄자에게 법적 처벌을 내린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 같은 법률 행위를 통해 피해자는 위로와 희망을, 대중은 공동체의 규범과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밝고 예뻐야 할 시간을 통째로 유린 당한 소녀에게 김씨가 감옥에서 사는 시간이 5년 더 늘어났다는 게 그리 중요할까. 이전까지 만난 적도 없는 법관이 자신의 고통에 공감하며 법정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 앞으로 소녀가 헤쳐나가야 할 삶 속에서 더 큰 위안이 될 수 있다.

 서초동에는 침착과 냉정으로 무장한 '법기술자'들이 널려 있다. 그들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예리하고 유려한 법 적용으로 갈채를 받기도 하며 성공의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법 지식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해 본 적이 얼마나 있을까. 

 법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존재하고 법관은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이다. 

 눈물을 흘린 그 판사는 감정적이지 않았다. 이성적인 슬픔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약자가 처한 극단적인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afer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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