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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빈의 클로즈업 Film]개리 올드먼, 혼신의 연기…'다키스트 아워'

등록 2018.01.15 08: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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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빈의 클로즈업 Film]개리 올드먼, 혼신의 연기…'다키스트 아워'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젊은 관객에게 배우 개리 올드먼(60)이 어떤 배우인지 묻는다면, 아마도 '다크 나이트' 시리즈(2005 2008 2012)의 '짐 고든' 정도를 생각해낼지 모른다. 조금 더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레옹'(1994)을 봤을 테고, 광기의 형사 '스탠스 필드'를 연기하는 젊은 시절의 올드먼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는 올드먼의 한쪽 단면만 본 것일테고, 후자는 30대 올드먼이라는 점에서 어느 쪽으로 봐도 그가 현재 어떤 배우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새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감독 조 라이트)는 이 질문에 가장 정확한 답변이 될 수 있다. 올드먼이 왜 여전히 '열정의 배우'로 불리는지 말이다.

 1940년 5월 나치는 유럽 대륙을 장악하고 영국 본토 입성을 눈앞에 둔다. 영국 의회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초당적 수상(首相)을 내세우기로 하고, 전 해군부 장관 '윈스턴 처칠'(개리 올드먼)을 양당 합의로 총리 자리에 앉힌다. 최악의 상황에서 영국을 책임지게 된 처칠이 받은 보고는 프랑스 덩케르크 해변에 약 33만명에 달하는 연합군이 독일군에 포위돼 있다는 것. 처칠은 결사 항전을 다짐하며 전멸의 위험을 무릅쓰고 덩케르크에 갇힌 군인들을 철수시킬 것을 지시하지만, 최소한의 피해를 위해 히틀러와의 평화 협정을 주장하는 이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이제 처칠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올드먼은 자신을 지우고 처칠 속으로 들어갔다. 숱이 적었던 처칠의 머리를 만들기 위한 삭발, 처칠의 육중한 몸을 만들기 위해 착용한 폼바디슈트와 당시 66세였던 처칠의 얼굴과 유사해지기 위해 착용한 분장용 가면 등…. 올드먼은 매 촬영마다 진행된 3시간에 달하는 분장을 통해 처칠이 됐다(분장을 제거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뭉개진 발음과 탁한 목소리, 구부정한 자세와 독특한 걸음걸이, 시가를 든 손모양과 사소한 제스쳐까지. 올드먼은 언뜻 봐서는 우리가 이전에 알던 그를 도저히 떠올릴 수 없도록 철저히 처칠이 됐고, 말 그대로 처칠에 빙의하는 방식으로 관객을 극으로 단번에 빨아들인다.
[손정빈의 클로즈업 Film]개리 올드먼, 혼신의 연기…'다키스트 아워'



 올드먼이 그린 처칠은 고뇌하고 또 고뇌하는 인간이자 주저와 망설임 속에서도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숙명을 떠안은 지도자다. 국제 정세 속 영국이 처한 최악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자신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은 국내 정치 지형을 고려해야 하고, 상징적 존재인 왕과의 관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나라를 이끄는 존재로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의무가 있고, 내 결정이 세계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중압감과도 싸워야 한다. '다키스트 아워'의 처칠은 초인적 정신력을 가진 영웅이 아니라 흔들리고 또 흔들리지만 선택하고 전진해야만 하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기에 기분이 좋다가도 짜증을 내고, 화를 내기도 한다. 잠시 희망을 품었다가도 금세 좌절한다.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떠벌이가 됐다가 더 깊은 절망에 침묵하기도 한다. 올드먼은 이런 진폭 큰 감정들을 매끄럽게 이어붙이는 경지를 보여준다. 그의 연기는 관객이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결론에도 충분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이 열연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처칠의 결단을 또 한번 감동적인 것으로 되살아나게 하는데, 특히 영화 대미를 장식하는 의회 연설 시퀀스에서 올드먼이 보여주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실로 감탄스럽다.

 '오만과 편견'(2005) '어톤먼트'(2007) 등에서 보여준 조 라이트 감독의 유려한 미쟝센 구성은 이번 작품에서도 빛난다. 조명과 카메라는 시종일관 처칠의 고독에 집중한다. 작전 회의를 위해 지하 워룸(War Room)으로 들어가거나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 장면 등에서는 처칠의 주변을 어둡게 해 그의 외로움을 더욱 부각한다. 처칠이 라디오 연설을 하며 국민에게 가짜 희망을 심어주는 순간에는 '생중계' 때 들어오는 빨간 불빛을 처칠의 얼굴에 쏴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좌절하고 있는지 강조하는 식이다.
[손정빈의 클로즈업 Film]개리 올드먼, 혼신의 연기…'다키스트 아워'



 '다키스트 아워'가 흥미로운 건 우리가 앞서 본 다른 영화와의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각종 후보에 오를 것이 확실시되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덩케르크'(2017)가 바로 처칠이 추진한 무모해보였던 바로 그 작전의 양상을 다룬 작품이다.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각본상)에 빛나는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이 바로 '다키스트 아워'에서 처칠 못지 않은 용기를 보여주는 왕 조지 6세다. '다키스트 아워'에서는 벤 멘델슨이, '킹스 스피치'에서는 콜린 퍼스가 연기했다.

 다만 이 영화가 처칠을 통해 시종일관 강조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용기'라는 메시지는 숱한 작품에서 반복된 것으로 전혀 새롭지 않다. 단적인 예로 '킹스 스피치'가 이미 '조지 6세'라는 캐릭터를 통해 큰 성과를 냈던 방식이며 메시지이고, '덩케르크'는 한 발 더나아가 이전에 본 적 없는 창조적인 연출로 이 보편적인 메시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바있다. '다키스트 아워'에는 올드먼의 연기를 제외하면 이 영화 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다. 처칠 캐릭터가 시대적·개인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조각되지 못하고, 오직 용기와 극복만을 말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건 큰 약점이다.

 올드먼은 연기파 배우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상과 거리가 멀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2012년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로 단 한 차례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을 뿐 어떤 작품으로도 후보에 오른 적이 없고(수상 실패), 심지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는 '다키스트 아워' 이전 후보에 오른 적조차 없었다. 올드먼은 이번 작품에서 그 자체로 뛰어난 연기를 했을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가 좋아할 만한 연기를 했다. 열정의 배우 개리 올드먼은 현재 오스카에 가장 근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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