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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우리 눈과 귀를 가리는 것들"

등록 2018.06.13 15:45:02수정 2018.06.18 14: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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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우리 눈과 귀를 가리는 것들"

【서울=뉴시스】 박주연 기자 = "역사적인 순간에 전화를 했네요. 지금 북미정상회담이 시작됐는데… 이게 현실인가 싶어요. 앞으로 큰 변화가 있겠죠."

지난 12일 오전 실적 관련 문의를 하기 위해 모 기업의 임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첫 마디가 북미정상회담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북미정상회담은 지구상에서 한반도에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냉전구조를 해체할 출발선이다.

지난해까지만해도 '늙다리 미치광이', '리틀 로켓맨'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위험한 감정싸움을 하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평화와 고요'를 뜻하는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서 만나 손을 잡았고, 긴 회담 끝에 평화를 위한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들을 회담장으로 이끈 주역은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냉전의 마지막 벽을 허물고, 핵 위협으로부터 인류의 안전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의미지만 북한의 비핵화와 긴장완화는 경제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지긋지긋한 '코리아리스크'에 시달려온 국내 기업들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완화돼 남북간 경제협력이 강화되면 리스크를 해소하고 시장을 키울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있다.

16개 광종 6586조4626억원에 달하는 북한 자원의 공동개발, 철도연결을 통한 일본·중국·러시아 관광객 흡수, 물류 개선으로 인한 수출 기간·비용 단축 등 북한과의 경제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엄청나다.

이를 반영하듯 주식시장도 들썩이고 있다. 토목·건설부터 가스관, 철도, 산림, 비료, 공항건설까지 다양한 북한 테마주들이 발굴되고, 이중 일부 종목은 연이어 신고가를 갈아치우고 있다. 군사 접경지역이라는 이유로 저평가됐던 파주·연천·철원 일대 땅값도 치솟고 있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무엇보다 우리 기업들의 '경협 트라우마'가 문제다.

한 기업인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과거 금강산 관광에 투자했던 현대아산이 정권이 바뀐 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지 않느냐"며 "기회가 온다고 해도 덮어놓고 투자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많아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부사장은 "변수가 많아 당분간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다. 솔직히 첨단 제조업을 하는 우리 같은 대기업이 북한에 투자할만한 게 있을까 싶다"고 말했다.

한 금융단체 회장은 "북한이 어떤 경우에도 핵을 완전히 포기할 것 같지 않다. 이러다가 또 북한에 우리만 돈을 퍼주는 상황이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경계했다.

"건설업체로서 큰 기대를 걸고 있고, 준비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반응이 없는 게 아니지만 남북경협의 주역이 되어야할 기업들의 소극적인 반응을 적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과거의 관행과 리스크, 냉전적 사고 방식에 사로잡혀 변화의 큰 흐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번 북미정상회담으로 남북경협의 길은 넓어졌지만 통일은 더욱 멀어졌다"고 진단한 어느 경제연구소 소장의 진단은 날카로워 보인다.  

물론 기업들의 상처를 모르는 바 아니다. 대북 사업에 앞장섰던 현대아산 뿐만이 아니다. 개성공단에 진출했던 기업들 역시 정권이 바뀌고 남북관계가 경색되며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지난 2016년 중소기업계를 출입할 당시 남북경색으로 개성공단이 폐쇄되자 한 기업의 대표는 기자에게 "정부를 믿고 투자한 것이 죄냐"고 호소하기도 했다.

장밋빛 기대만을 해서도 안 된다. 그러기에는 대북 사업과 관련해 미국과 중국, 일본 등의 이해관계가 복잡다단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북한의 셈법도 복잡하다. 대북제재가 완화된다고 해도 이로 인한 모든 수혜가 우리나라에 집중되기도 어렵다.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완화해주는 대신 미국기업 진출이나 자원개발 사업권 등을 요구할 수 있고, 북한 역시 체제 보장을 위해 위해서는 미국 기업의 진출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눈밝은 사람이라면 한반도를 비롯해 세계무대에서 일어나는 작금의  변화는 과거와는 분명 다를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지난 30여 년간 신자유주의 세계체제가 빚어낸 양극화, 그것이 불러온 미국 역사상 가장 이질적인 대통령인 트럼프의 등장, 봉건적인 세습체제 북한에서 해외유학파 젊은 리더의 등장, 그리고 둘의 만남은 시대가 그만큼 달라졌음을 극적으로 웅변하는 것이 아닐까.

"북미정상회담이 냉전을 해체하는 세기의 대사건"이라는 청와대의 평가까지는 접수하지 않더라도,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변화에 우리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둔감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을 먼저 감지하고 변화의 쓰나미를 촉발시키는 사람은 김정은 위원장처럼 보인다.

그는 어제 트럼프대통령과의 단독 정상회담 모두에 "우리한테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기도 했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강조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과거의 냉전적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자는 의미로 들렸다면 기자만의 생각일까.

변화는 신사고를 동반한다. 변화의 주역으로 나서려는 사람에게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어쩌면 냉전적 사고를 이겨내자는 이 외침에, 이 외침이 불러올 미래의 거대한 변화에 우리 기업들도 지금부터 차근차근 응답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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