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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아트클럽]'침묵의 화가' 윤형근 깨운 김인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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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8-03 08:26:57  |  수정 2018-08-13 09:20:08
2007년 사후 11년만에 국립현대미술관서 첫 회고전
'단색화 원조'...스승 김환기 넘고 싶었던 '김환기 사위'
9년전부터 전시 추천...사진·일기·자료 남겨 입체 조명
유족 보관 미공개 드로잉·청다색 회화등 100여점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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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한국 단색화의 거목 윤형근(1928~2007) 작가 회고전을 앞두고 2일 서울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언론 프리뷰를 가졌다. 이날 1980년대 후반 이후 작품들이 첫 공개됐다. 김인혜 학예연구사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2018.08.02. chocrystal@newsis.com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기록은 기억을 이긴다. 그는 예견했을 것이다. 이런 날이 올 것을…

 "1967년부터 한 장소에서 살아서인지 많은 작품과 자료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어요. 1928년 출생인데 당시 가족사진부터 1944년 청주상업학교 교련수업 사진, 1951년 미군부대 근무 시절 등 성장 시기별 사진부터 엽서 편지 전시 포스터 신문기사 등이 빼곡히 있었는데 이분 생애가 처음 알려지는 사실과 상당히 놀라운 일들이 많아 흥미로웠어요."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44)학예연구사가 그의 이름에 시달린 건 9년 전이다.

 2009년 어느 날 미술계 재야의 고수가 다짜고짜 찾아왔다. "이 사람 전시를 해야 한다"며 강추했다.

  "피래미 학예사인데 나한테 왜 이러지?" 신뢰하고 존경하는 분의 말이었지만 시큰둥했다.

 "단색화 작가? 단색화 많은 작가중의 한 사람? 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존경심'에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 사람을 존경할 수가 있나. 저 분이 존경하는 저 분이 궁금해졌죠."

 공부를 시작했다. 구술 채록과 평론가들의 이야기, 아카이브를 조사할수록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의 작품은 외국으로 계속 팔려나가는 상황. 더 이상 안되겠다 싶었다. 단색화 위상도 높아진 시점에서 "이제 미술관에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형성됐다.

   '피래미 학예사'였던 그는 이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직 16년차가 됐다.  2010년 아시아 리얼리즘, 2012년 덕수궁 프로젝트, 2016년 유영국, 절대와 자유 그리고 2016년 :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만들며 역량을 넓혀왔다. 

   그렇게 전시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건 2년 전이다.  김인예 학예사는 "제가 그동안 기획한 작가들(이중섭·유영국 등)중 사상의 차원이 가장 큰 것 같다. 알면 알수록 내가 너무 작아진다"고 했다.

  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3, 4, 8 전시실에서 윤형근 회고전이 개막한다. 2007년 윤형근 사후 최초로 미술관에서 열리는 대규모 전시다. 작가 사후 유족이 보관해온 미공개작을 포함한 작품 40여점, 드로잉 40여점, 아카이브 100여점이 선보인다. 1980년 광주항쟁으로 인해 탄생된 작품을  포함하여 네덜란드에서 공수한 지금껏 공개 되지않았던 작품도 나왔다.
 
 특히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해외작가들의 전시가 이어지는 서울관에서 펼쳐 이례적이다. 그동안 과천관과 덕수궁관에서 열렸던 국내 근현대 작가들의 전시와는 다른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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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생전 윤형근의 서교동 아틀리에 모습 그대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재현됐다. 벽 가운데 도널드 저드의 낙품이 걸려있고, 고가구와 도자기 등이 작가의 작품과 함께 놓여 있다. 아래 사진은 윤형근(1928~2007)이 1989년 서교동 화실 작품앞에서 찍은 생전 모습.

   '단색화가'중 가장 조용하던 윤형근 화백의 부활이다. 현재 살아있는 단색화가들도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를 받지 못했다.

  왜 윤형근(1928~2007)일까?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윤형근 작가를 제대로 조명하면 한국미술의 풀릴 수 있는 실마리가 많다"며 "진짜 단색화 원조는 윤형근 작가"라고 말했다.

  "그 분을 단색화 틀안으로 넣기에는 너무나 옹졸해져요."

   단색화로 일본 화랑계에 첫 진출한 화가라는 것. 미니멀리즘 모노크롬이 대세인때 1974년 한국을 방문한 미술평론가 조셉 러브가 윤형근 작품을 보고 한 눈에 빠졌다. "한국 시골의 김칫독처럼 단순하고 흙냄새가 풍긴다"며 일본 도쿄화랑 야마모토 타카시에게 소개했다. 1976년 도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이 전시 서문을 이우환이 썼다. 

    원로 미술평론가 오광수 뮤지엄산 관장도 "그가 단색화작가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은 별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면서 "꾸밈없고 침묵하는 그 무엇'이라고 했을 때의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그의 작품은 단색화와 공유된 감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집단으로서의 단색화와 일정한 거리를 지니고 있는 이유"라고 했다.

 윤형근은 생전에도 말이 없는 작가로 '침묵의 화가'로 불린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조명한 윤형근의 삶은 그대로 한국역사다. 점잖고 진중한 이미지와 달리 어두운 시대 울분과 서러움을 삭이며 삶을 살아냈다.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윤형근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그러나 언젠가는 공개될 것을 예상하고 꼼꼼하게 모아 두었던 자료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며 "알면 알수록 우리나라의 위대한 작가"라고 강조했다. 
 
  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왜 이렇게 어둡게 그린 것인지 좀처럼 알수 없었던 그림. 누렇게 변한 작가 노트와 일기가 이제야 말하고 있다. "내 그림은 나의 똥이요 몸이요 얼굴이요 가슴이다. 화가 극도로 났을때 독한 내 무엇이 십분 화면에 베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일기를 쓰듯이 그날그날 기록해 보는 것이 내 그림이요 흔적이다."(윤형근, 1984)

  ◇윤형근(1928~2007)은 누구?

 1928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6남2녀 차남으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참혹했던 역사적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파평윤씨 문정공파 대장손으로 아버지 윤용한은 경성고보 출신 지식인이었지만 식민지 시기 낙향, 서예와 사군자를 그렸던 문인화가였다. 어쩌면 금수저 출신이지만 식민지탓에 군국주의를 경험하며 녹록치않은 인생이 이어졌다.  1945년 청주상고를 졸업한 후 미원금융조합에 취직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어 사직서를 내고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 가출하듯 서울로 상경했다.
  
   미술로 입문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1947년 서울대 미대 1회로 입학했지만,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류 조치 후 제적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학창시절 시위 전력(前歷)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다. 전쟁 중 미술동맹에서 스탈린 김일성 초상화 등을 그려 돈을 벌었고, 피란 가지 않고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1956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유신체제가 한창이던 1973년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중앙정보부장의 지원으로 부정 입학했던 학생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레닌 모자를 쓴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총 3번의 복역과 1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극도의 분노와 울분의 경험은 그를 화가로 이끌었다. 1980년까지 파출소에 등록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 미술교사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품 제작을 시작한 건 그의 나이 만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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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윤형근전을 큐레이팅한 김인혜 학연연구사가 윤형근의 1977년 작품 '청다색'을 한 문화원으로부터 건네받아 횡재받은 기분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며 기뻐하고 있다.

 ◇ 스승이자 장인 김환기 넘고 싶었던 화가

 그의 그림은 묵직하다.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형상을 절제한 채 짙은 청색과 다갈색을 기조로 수평 혹은 수직의 획만을 허용한 그의 작업은 조용하면서도 현대적인 세련미를 가지고 있다. 색띠에서 번져 나오는 선염의 미묘한 진행은 화면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게 특징이다.

  면포나 마포 그대로의 표면 위에 하늘을 뜻하는 청색(Blue)과 땅의 색인 암갈색(Umber)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정색’을 큰 붓으로 푹 찍어 내려 그은 것들이다.

  누리끼리하고 검은 화면의 그림을 작가는 스스로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했다. '천지문'이라 지은 이유에 대해 1977년 1월 "블루(Blue)는 하늘이요 엄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라 했고 내 그림의 구도는 문(門)이다."는 일기를 남겼다. 

   처음부터 어두운 작업은 아니었다.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수화 김환기(1913~1974)의 영향을 받아 밝은 색채를 사용했었다. 작업이 변한건 1973년 ‘반공법 위반’의 누명을 쓰고 서대문형무소를 다녀온 후 색채를 잃게 됐다.
   
  김환기와 윤형근은 특별한 인연의 끈으로 이어졌다. 윤형근이 처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입학시험을 보러 간 날 시험감독관이 김환기였다. 그 후 윤형근이 제적당하고 홍익대학교로 편입할 때에도 홍대 교수였던 김환기가 그를 이끌었다. 그러다 1960년 윤형근이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함으로써, 두 사람은 장인-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윤형근은 평생 김환기를 ‘장인’이 아닌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김환기 또한 윤형근을 신뢰와 존중으로 대했다.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이들은 나이차이가 불과 15살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면에서는 선후배처럼 가까웠고, 어려운 시기 외로운 화가의 길을 함께 걸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동지애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윤형근은 김환기의 죽음을 통보받고 '너무나 불쌍하고 뭔지 모르게 한없이 원통해서 밤새도록 통곡을 했다"고 회고한 일화를 전했다.

 윤형근은 김환기를 넘고 싶었다. 1974년 10월 윤형근은 김환기 작고 소식을 들은 후 자신의 아뜰리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벽 한쪽에는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걸려있고, 그 옆에는 윤형근의 '천지문' 신작들이 붙어있다. 바로 그 사이에서 윤형근은 슬리퍼를 신은 채 주먹을 불끈 쥐고 당당한 자세로 서서 정면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다.  김인예 학예연구사는 " 이 사진은 김환기에서의 출발과 김환기로부터의 결별을 동시에 선언하는 윤형근의 야심찬 기록"으로 봤다.

  윤형근은 김환기 작품을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잔소리가 많고 하늘에서 노는 그림"이라고.

  윤형근은 1977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그림은 잔소리를 싹 뺀 외마디소리를 그린다. 화폭 양쪽에 굵은 막대기처럼 죽 내려 긋는다. 물감과 널찍한 붓 그리고 기름, 면포나 마포만이 내 작품의 소재다. ...왜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깨끗한 작업과정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젊은 시절 전란속에서 살아오다 보니 안정된 화실에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그의 작품은 김환기의 것과는 달리 하늘에서 노닐지 않는다면서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는 서정을 대신해서 그의 흙빛깔 작품들은 훨씬 더 인간의 피와 땀을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윤형근 작품은 간결해서 '잔소리'를 찾을 수 없다. 색채는 엄버와 블루 두가지뿐. 천조차도 평범한 마포나 면포일뿐이며 불투명한 백색 도료를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표면에 슬쩍 바른 것이다. 후기 작품은 한층 더 간결해져 색채는 미묘한 차이가 제거된 순수한 검정색으로 변했다. '회화라든가 표현이라든가 형상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지각 너머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같은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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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재현된 윤형근 거실에는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수화 김환기 화백의 소품이 걸려있다. 2018.08.02. chocrystal@newsis.com

◇사선(死線)을 넘어선 화가...추사-요셉보이스 존경

 "내 작품은 내가 살아온 고난의 세월 이야기를 함축시킨 것이지. 그래서 내가 요셉 보이스를 좋아하는거야. 그 사람 작품보면 죽음의 그림자가 싹 지나갔어. 섬뜩한데가 있어. 그건 뭐냐면 그 사람의 인생이 사선(死線)을 넘어섰기 때문이지. 그걸 넘어섬으로써 차원이 제일 높이 올라가는거야. 그 이전에는 다 잔소리에 불과하고 죽느냐 사느냐 그 차원에서 엄청나게 차원이 올라간다 이거야. 나는 1950년대에 살아남은 사람이고,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가 엄청난데 200만이 죽었어. 사선에서 살아남고 잉여 인간 같이 살아가면서 다시는 내가 타락할수 없는 인간이라는 그런 진리로 인해서 그렇게 살아온 그런 무서운 고비를 넘은 사람이에요."(생전 인터뷰중)

 2007년, 그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해에, 그는 20여 점의 연작을 남겼다. 1970년대 작업 초기에 즐겨 썼던 하얀 면포를 다시 꺼내들어, 그는 단 두 개의 검은 사각형을 때로는 나란히, 때로는 이렇게 비스듬히, 때로는 저렇게 비스듬히 세워 놓았다. 그리고 때로는 더욱 지친 듯, 쓰러질 듯 기대어 놓기도 했다.

 "지상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윤형근의 이 말은 무섭도록 엄숙한 진리이며서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어쩐지 담담한 위로로 들린다.       

 전시는 묵묵하고 담담한 그림뿐만 아니라 윤형근의 세계관을 들여다볼 수 있게 꾸몄다. 윤형근의 생활공간과 작업실을 전시장에 옮겨왔다. 그가 사랑했던 목가구와 목기, 도자기와 토기 등 조선의 공예품들이 가득하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 김환기의 그림, 엄혹한 시기에 함께했던 최종태의 조각, 그리고 도널드 저드의 작품 등이 함께 했다. 그와 관계 맺었던 인물들, 사물들, 그리고 윤형근 자신의 일기, 노트, 사진, 드로잉 등 각종 아카이브를 통해, 윤형근이 추구했던 정신세계,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 (미술관 전시와 갤러리 전시의 차이다.)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작업실에는 추사의 글씨가 담긴 오래된 나무액자가 걸려있는데 그가 존경했던 추사 김정희가 추구했던 불계공졸의 세계, 소박한 경지를 추구했다"며 "천진난만하며 때로 다소 서툰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조선의 미학이 윤형근이 작품을 통해 진실로 다다르고 싶어했던 경지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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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화가 윤형근 사후 이후 국내외 경매사에 출품된 작품수와 낙찰가. 아래 그림은 2016년 5월 28일 크리스티 홍콩경매에서 6억9897만원에 낙찰되어 작가 최고가로 기록되어 있는 윤형근의 1975년작 '청다색'(181.6×99.7cm 마포에 유채).자료 제공:(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윤형근은 그동안 미술시장에서 일명 '단색화 4인방'(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윤형근)으로 불리며 이름이 계속 회자됐다. 단색화의 급부상으로 사후에 작품값이 20배 정도 상승한 '블루칩 작가'로 꼽힌다. 지난해 1월에는 세계 최정상급 갤러리인 뉴욕 데이빗 즈워너 갤러리에서 연 초대 개인전에서 작품이 모두 팔려 화제를 모았다.

  국제적인 인지도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윤형근이 어떤 작가인지 뒷전이었다.

  '단색화 잘 팔리는 작가', '김환기 사위'로 'PKM갤러리 작가'로만 알려진 화가 윤형근의 생애와 작품세계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숙고하게 만든다.

  '순수한 그림일수록 어렵다'. 누렇고 까만 심심하기까지 한 그림은 알고보면 '대교약졸(大巧若拙)'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가 열리지 않았으면 몰랐을 면모다. 결국 작가를 살리고 묻히는건 기획자(큐레이터)다.

 '얼마에 팔렸다'로 떠들썩한 미술시장은 작품은 없고 돈만 보인다. 우리 작가의 위대함을 알리고 공유하게 하는 건 미술관의 역할이다. 윤형근은 장인 김환기 앞에서 미소를 지을 것 같다. 국내에서 가장 비싼작가 1위(85억) 김환기도 못한 개인전을 작가로서 최고 명예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으니 말이다.  '김환기 대세'인 국내 미술시장은 이제 은근히 반격하는 윤형근의 한판승부를 예고하고 있다. 사후에도 장인과 사위가 벌이는 미술판의 독특한 경쟁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윤형근은 장인 김환기 선생 5주기인 1979년 7월 25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몹시 무더운 날이다.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고, 허무할 소다."

  2007년 12월 28일, 향년 79세 윤형근도 담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격랑의 시대 사연이 그림 속에 다 녹아있다. '퇴색한 것 같은, 탈색한 것 같은 그런 빛깔'. 그림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전시는 12월16일까지.

 hyu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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