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김이강 '타이피스트'·육근철 '설레는 은빛'·이대흠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타이피스트
2006년 '시와 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김이강의 두 번째 시집이다. 빛과 어둠으로 세계를 드러내는 독창적 시선을 연출한다.
빛과 어둠의 또 다른 구실은 그들 아래 혹은 위에 있는 질료 자체의 질감을 더욱 생생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에서 어둠은 시의 질료와 분위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끔 시선을 유도한다.
'애인이 손을 따 주었습니다/ 체했거든요/ 아름답고 따뜻한/ 겨울밤이었습니다// 애인은 바늘로 찔렀습니다/ 엄지손가락에서/ 피가 날 만도 한데// 애인과 나는 깔깔깔 웃었습니다/ 엄지손가락에 송송송 구멍만이 남았거든요/ 아름답고 따뜻한/ 겨울밤// 우리는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요'('나는 어떻게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중)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던 다리가 앙상하게 빛납니다/ 물결이 빛나고요/ 가로등이 빛나고요/ 사람들이 걸어갑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던 사람들이 동전을 던집니다/ 바닥에는 모자가 있고요/ 석상 하나가 슬픔에 차 있습니다'('다리가 있는 강가' 중)
'아버지가 오래 다듬어 놓았던 길로 걸어 나가서 수북한 식량들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생각했어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고 모두가 단단해져 가는 동안 오로지 엷은 피부의 당신만이 이토록 수북하게 마음을 들여 이 여름을 연장하고 있다고// 어느 날 꾼 꿈속에서 우물 속으로 들어간 당신은 비밀을 발견한 것처럼 저 깊은 바닥에서 외쳤죠 우리의 숲은 끝나지 않는 것이란다, 끝나지 않는 동안 숲이야'('우리의 숲은 끝나지 않는다' 중) 126쪽, 9000원, 민음사
'시와 정신'으로 등단한 육근철 공주대 물리교육학과 명예교수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넉줄 종장시'(시조의 종장인 3·5·4·3 형식을 빌려 쓴 15자의 짧은 시)를 통해 긴장과 압축의 미학을 실현했다. 220여 작품이 담겼다.
'산 벚꽃/ 쏟아지는 강/ 반짝이는/ 잔물결'('꽃비' 전문)
'두 쪽지/ 사랑의 편지/ 이 꽃 저 꽃/ 배달부('나비' 전문)
'골목길/ 비 젖은 낙엽/ 구멍 난/ 가을 저녁'('가을비' 전문)
시인은 "넉줄 종장시는 누구나 항상 새로운 시심을 갖고 시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자연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어 맑고 밝은 시심을 갖고 시심을 연마하는 데 유용하다. 또 짧고 단순하고 감동받기를 좋아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필요한 시라 할 수 있다." 176쪽, 1만원, 밥북
1994년 '창작과 비평'에 '제암산을 본다' 외 6편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대흠의 다섯번째 시집이다. 삶의 비의와 본질에 가닿는 사유의 깊이와 시선이 느껴지는 따듯한 시편들이 실렸다.
'강으로 간 새들이/ 강을 물고 돌아오는 저물녘에 차를 마신다// 막 돋아난 개밥바라기를 보며/ 별의 뒤편 그늘을 생각하는 동안// 노을은 바위에 들고/ 바위는 노을을 새긴다// 오랜만에 바위와/ 놀빛처럼 마주 앉은 그대와 나는 말이 없고// 먼 데 갔다 온 새들이/어둠에 덧칠된다// 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 여기 있다('천관(天冠)' 전문)
'달이 빛나서 북천이 밝습니다/ 북천이 밝아서 당신이 보입니다/ 나를 보고 웃는 낯빛이 고요합니다// 단 하나의 사랑을 지어 달로 띄워 올립니다'('북천의 달빛' 전문)
'아버지는 어머니가 평생 흘려 모아 말린 별씨를 들고/ 어느날 훌쩍 하늘밭으로 가버리셨다// 서쪽 하늘에 움 돋는 눈물별// 구석에 버려진 조각 비누 같던 한생이/ 문득 아주 버려진 날'('눈물별' 전문) 118쪽, 8000원,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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