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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①2번방의 "독립만세"…유관순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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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2-19 06:00:00
이신애, 만 28살에 항일 독립운동 참여 결심
3·1운동 검은상장 달아주며 독립운동가 첫 발
항일 여성독립단체 활동, 군자금 마련 대활약
'전협' 만나 대동단 가입…부인단 대표로 활약
'제2독립선언문' 서명 33인 대표중 유일 여성
안국동 경찰관주재소 앞 시위 주동자로 체포
형무소에서 3·1운동 1주년을 맞아 다시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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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옥중에서의 이신애 선생의 모습. (사진 = 공훈전자사료관 제공)
【서울=뉴시스】안채원 기자 = 1920년 3월1일. 아직 밖은 엄동설한이다. 딱딱한 서대문형무소의 바닥은 더욱 그랬다. 볕이 들지 않아 어둡기까지 했다.

이곳은 형무소의 17개 여옥사 중 한 곳인 2호 감방. 여기엔 만 29세의 여성독립운동가 이신애가 있었다. 동지 유관순이 수감돼 있던 8호 감방 옆이었다.

오후 2시, 3·1운동 1주년을 맞아 형무소 안에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때를 기다리며 이신애는 잠시 눈을 감았다. 1년 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꼭 1년 전인 1919년 3월1일. 이신애는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 있었다. 검은 상장(喪章)이 담긴 꾸러미를 든 채였다. 이신애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흰옷에 검은 상장을 달아줬다. 독립운동을 위해 서울에 온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사실 이신애는 더 '큰일'을 하고 싶었다. 만 28살, 교사와 전도사로 일하던 삶을 뒤로한 채 온 서울이었다. 아직도 원산에서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들었을 때의 떨림이 생생했다. 부흥회에 강사로 초빙된 손 목사는 그날 조국과 독립을 이야기했다.

그날 이신애는 마음 깊은 곳 어디선가 뜨거운 것을 느꼈다. "우리 나라의 어려운 형편을 고려하고 자유, 진리,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칠 사람은 지금 거수하라"는 손 목사의 말에 이신애는 망설임이 없었다.

"조국을 위하여 죽는 것이 왜인 밑에서 숨을 죽이며 호화롭게 잘사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독립투사' 이신애의 삶은 3·1 운동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비밀리에 항일여성독립운동단체들이 속속이 결성되던 그해 5월께 이신애는 혈성부인회에 몸을 담았다. 수감된 독립투사들과 그들의 남은 가족들을 돌봤다.

그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동분서주했다. 서울에서 원산으로, 원산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 독립운동가 전협을 만났다.

전협은 3·1 만세운동 후 상해에서 김구와 독립운동을 논의해 서울로 돌아와 있던 터였다. 그는 항일 비밀단체를 조직 중이었다. 그 단체는 3·1운동 후 조직된 최대 규모의 항일 지하조직으로 역사에 길이 남겨질 '민족대동단'이 된다.

이신애를 만났을 때, 전협은 그 빛나는 눈동자를 보았다. "3·1운동과 같은 제2회 조선독립선언을 할 것일세. 우리와 함께하겠나." 전협의 제안에 이신애는 한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죽을 때 입 없이 죽겠습니다."

이신애는 그렇게 '선서'를 하고 대동단의 일원이 됐다. 11개 지단 중 하나인 대동단 부인단의 총대를 맡았다. 그렇게 항일운동최전선의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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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한 독립운동가 전협. (사진 = 공훈전자사료관 제공)
대동단의 활동은 거침없었다. 파리강화회의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 민족 독립의지를 담은 진정서를 작성해 보내는 지하문서 활동을 했다. 3.1운동과 같은 '개천절 만세 운동' 등 대규모 운동도 계획했다.

그 굵직굵직한 활동 중에는 '의친왕 이강 상해 망명 작전'도 있었다. 상해로 간 의친왕을 임시정부에 참여시키고 '제2차 독립선언'을 발표한다는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이신애의 이름이 빠질 수 없었다.

이강이 궁 밖으로 빠져나갈 때 궁 안과의 연락책 역할을 하기로 한 것이 이신애였다. '왕의 아들의 안전한 탈출은 내 손에 달렸다'는 생각이 이신애를 압도했다.

그 간절한 마음이 통했을까. 의친왕은 무사히 궁을 빠져나갔고 압록강을 지나 만주 안동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탈출계획을 눈치챈 경찰이 역 앞에 있었다. 망명은 물거품이 됐다. 이강은 서울로 돌아왔고 전협 등 함께했던 대동단 일원들은 체포됐다.

수면 아래 있던 대동단의 실체도 드러났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였다.

다행히 이신애는 체포망에서 벗어났다. 흔적 없이 사라진 동지들이 눈에 밟혔지만 이렇게 주저앉을 수 없었다. 이신애는 부인단의 대표였다. 그가 조국을 위해 삶을 바치자며 대동단 합류를 설득해 데려온 이들도 여럿이었다. "멈출 수 없다."

이신애는 마음을 굳혔다. 3·1운동으로 불탔다가 꺼져가는 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 살려야 했다.

다행히 뜻을 함께하는 단원들이 몇 남아 있었다. 이들은 제2독립선언문 발표와 함께 만세운동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만세를 외치며 흔들 태극기를 만들고 사람들 사이에 울려퍼질 선언문 작성에 공을 들였다. 선언문에는 33명의 이름이 올랐다. 이신애도 33인 중 하나였다. 유일한 여성이었다.

1919년 11월28일 오후 4시20분께. 서울 종로구 안국동 경찰관주재소 앞에 이신애와 대동단원 4명이 섰다. 이들은 '대한독립만세'가 써진 깃발과 수건을 휘두르며 행인들을 모았다.

200여명 정도가 모였을 때 이신애가 선두에 서 소리쳤다. "대한 독립 만세!"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연달아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태극기와 선언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건 한순간이었다. 일경들이 대동단원들을 에워쌌다. 이신애는 시위 주동자로 지목됐다. 그렇게 서대문형무소로 끌려왔던 게 석 달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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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제2차 독립선언문'으로 작성한 조선민족대동단 선언문. 대표단 33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사진 = 사단법인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차가운 바닥에 앉아 이신애는 생각했다. 고작 1년 사이, 그의 삶은 180도 바뀌어져 있었다. 교편을 잡았던 원산에서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해야 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석 달 간 차가운 감옥에 있으면서 수도없이 목청껏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꿈을 꿨다. 더는 꿈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었다.

'댕'…'댕' 괘종시계가 두 번 울렸다. 시간이 됐다는 신호였다. 이신애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수천명의 동지들의 목소리가 형무소를 가득채웠다.

이신애는 생각했다. '이곳이 광장이요, 이것이 내가 여기서 해야할 일이다.' 1년 전처럼 이신애의 눈이 다시 빛났다.

 newkid@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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