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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①임신한 몸으로 폭탄 거사…"침략자는 응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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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2-22 06:00:00
1920년 평양 주요기관 폭파 거사 가담
"3‧1운동 효과 못내…무력 응징이 주요"
3·1운동, 대한애국부인회 거치며 변화
평양 거사 이후 낳은 아이와 함께 수감
복역 8년 만에 가출옥…이후 행적 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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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안경신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최현호 기자 = 평화는 때때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타자를 제압하는 힘은 결국 물리력에서 나온다. 인간 사회 한켠을 지배하는 이 법칙은 일제강점기를 사는 한국인 안경신(1888~미상) 선생에겐 신념과도 같았다. 비록 남성에 비해 약한 물리력을 가진 여성의 몸이었지만, 3·1운동의 한계를 본 그에게 무력은 곧 대한 독립의 절대적 수단이었다. 아무리 새 생명을 뱃속에 품고 있는 상태일지라도.

"나는 3․1운동 때도 참여하였지만 그 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단결과 힘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 - 투탄(投彈), 자살(刺殺), 사살(射殺) - 같은 일회적 효과가 크게 주요할 것으로 믿고 있다."

안 선생이 남긴 이 말은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임신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1920년 8월3일 진행된 평남도청과 평남경찰부 폭탄거사에 뛰어들었다.

◇임신한 몸으로 평양 평남도청 폭파 거사에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그해 8월 중 미국의원시찰단이 한반도를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시기를 맞춰 국제 여론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 의원단이 상해에 체류할 때 그들을 만나 선전물을 전달하고 가두시위를 전개하는 동시에, 국내에선 대한광복군 총영이 폭탄 거사를 실행하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대한광복군 총영은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이다.

안 선생이 속해 있던 광복군 총영은 당시 서울, 평양, 신의주 등 세 도시에서 폭탄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안 선생은 평양을 담당한 결사대 제2대로 폭탄 거사에 참여했다.

제2대는 1920년 7월 중순께 광복군 총영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 그해 8월1일 평양에 잠입했다. 이 과정에서 제2대는 친일파 황계익을 처단하고, 검문하려는 일경을 사살하는 등 크고 작은 임무도 수행했다.

이틀 뒤인 1920년 8월3일 오후 9시30분께. 제2대와 이들을 돕는 평양 현지 의용단원들은 세 개 조로 나뉘어 움직였다. 제1조는 평남도청, 제2조는 평양경찰서, 제3조는 평양부청 폭파를 맡았다. 안 선생은 제2조에 속해있었다.

이들 중 제1조만 거사에 성공했다. 제1조는 1차 시도에서 실패했지만 다시 폭탄을 던져 신축건물인 제3부(평남경찰부)의 담장과 유리창 등을 파괴했고, 일경 2명을 폭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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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당시 목표물 중 하나였던 평양경찰서 모습. 2019.2.20(사진=독립기념관)  photo@newsis.com
안 선생이 속한 제2조는 평양경찰서 앞에 도착해 도화선에 불을 붙였지만 빗물 때문에 불이 붙지 않아 실패했다. 제3조도 평양부청에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했다.

비록 안 선생이 속한 제2조가 평양경찰서 폭파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이는 상당한 성과로 평가된다. 상해에서 출발한 결사대 3개대 가운데 안 선생이 속해 있던 제2대만 폭탄 거사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삼엄했던 경비와 낮은 수준의 폭파 기술력, 폭탄을 국내에 들여오는 과정 등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폭파 이후 언론 통제로 2주 동안 알려지지 않던 이 사건은 매일신보가 1920년 8월19일자 신문을 통해 보도한다. 이 보도 내용을 통해 당시 폭파 수준과 그 여파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본월 3일 저녁에 평양에서는 폭탄사건이 일어나서 제3부를 파괴코저한 독립당이 있어서 매우 소동되며 평양천지는 가위 물 끓듯 하였지만 그 때 본사 평양지국에서는 시각을 지체지 않고 급히 전보로서 그 폭탄사건의 상황을 기별하여 왔었으나 당국의 금지로 인하여 보도치 못하였더니 지금에 비로소 당국이 해금하여 보도의 자유를 얻었음으로 그 일의 전후사실의 경과를 평양지국의 통신대로 보도하오."

폭탄 거사 직후 안 선생은 어느 참외밭으로 피신해 하룻밤을 보낸다. 안 선생은 다음날 다시 한번 거사 기회를 노리지만 경비가 너무 심해 실패한 뒤 피신했다. 하지만 다음해 3월20일, 안 선생은 일본 경찰에게 피신한 곳이 발각돼 결국 체포된다. 아기를 낳은 지 열흘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3·1운동, 대한애국부인회 활동…항일 무력운동 계기

안 선생이 임신한 몸에도 불구하고 폭탄 거사에 가담한 이유는 1919년 평양 3·1운동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3·1운동, 대한애국부인회 활동 등의 독립운동을 이어오면서 평화적인 방식으로는 독립 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평안남도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안 선생은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을 수료한 뒤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서문동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안 선생은 이 일로 체포돼 29일간 유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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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당시 목표물 중 하나였던 평양부청 모습. 2019.2.20(사진=독립기념관)  photo@newsis.com
이후 안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산하 국내기관인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다.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조직된 여러 항일여성운동단체들 중 하나다. 이 단체에서 안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안 선생이 속해 있던 대한애국부인회 강서지회는 1920년 10월 일본 경찰에게 발각된다. 낙심한 안 선생은 이후상해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피신해 대한광복군 총영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안 선생은 이같은 과정을 겪으며 평화적인 방법으론 효과적인 독립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들은 눈이 멀고…출옥 후 알 수 없는 행적

안 선생은 평양 폭탄 거사 이후 평양지방법원에서 진행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안 선생이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며 투서했고, 안 선생도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했다. 결국 투서가 참작돼 안 선생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와 관련된 기록은 많지 않다.

갓난아기 때부터 감옥에서 키워진 그의 아들은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 시각장애인이 됐다. 그가 수감된 지 3개월 만에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수감 8년째 되는 해 가출옥해 친오빠와 함께 생활했고, 당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했다는 기록 정도가 전부다.

정부는 1962년 안 선생에게 건국훈장 국민장(독립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받아가는 이가 없었다. 국가보훈처는 광복 70주년인 2015년, 안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wrcmania@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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