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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아베의 망언과 문재인의 분노

등록 2019.08.06 06:30:00수정 2019.08.06 15:3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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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아베의 망언과 문재인의 분노


【서울=뉴시스】김태규 기자 = "한일 관계를 더 가깝게 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양국이 공동으로 노력해 지혜롭게 해결해 나갈 것을 희망합니다. 이 문제가 한일 양국의 다른 관계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번째 한일 정상회담 때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에게 한 말이다. 국제사회의 원칙에 따라 한일 간 역사문제를 해결해 나가되, 역사 문제가 미래 관계에 발목을 잡지 않도록 '투 트랙'으로 분리해 대응해 나갈 것을 아베 총리와의 첫 회담 때 제안한 것이다.

만남이 이어지는 과정에서도 문 대통령의 생각은 흔들림 없었다. 국가 간 합의로 '원죄(原罪)'마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국가 간 합의가 개인의 권리마저 처분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아베 총리를 설득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아베 총리는 과거가 현재에 개입해 미래를 가로막는 것은 한일 관계 발전에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문 대통령의 인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일한 관계 구축'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 했다.

한일 간 껄끄러운 과거사 문제를 쟁점화 하지 말아야 미래지향적인 관계 구축을 위한 논의가 가능하다는 문 대통령 제안의 전제 조건을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을 '레토릭(정치적 수사)'으로 고수했다.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일한 관계를 구축해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2017년 7월7일), "여러 가지 분야에 있어 미래지향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2017년 9월7일), "미래지향적이고 새로운 관계 구축을 위해 솔직하게 의견을 나눴으면 좋겠습니다"(2018년 2월9일),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문 대통령과 함께 열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2018년 5월9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겠습니다"(2018년 9월25일).

다섯 차례 한일 정상회담에서 내놓은 아베 총리의 모두 발언은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참석 계기로 마련된 3차 한일 정상회담에서 '솔직하게'라는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부사 정도가 추가됐다는 것이다.

당시 비공개 회담에서는 박근혜 정부에서 맺은 12·28 위안부 합의 이행을 놓고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정면충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베 총리는 "국가 대 국가의 합의인 만큼 정권이 바뀌어도 지켜져야 한다"며 합의 이행을 촉구했고, 문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는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고 그 분들의 입은 마음의 상처가 아물 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지, 정부 간 주고받기 식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맞받았다.

공개된 모두 발언에서 아베 총리가 직접 거론한 '솔직하게'라는 표현에서 속내를 유추할 수 있다. 박근혜 정권에서 이뤄진 국가 간 합의를 뒤집은 문 대통령의 '속뜻'이 무엇인지 답하라는 의미가 담긴 불만적인 추궁의 메시지로 읽힌다. 물론 문 대통령 입장에서는 불쾌했을 단어다.

문 대통령은 이후 5차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지만, 당시 합의의 산물로 현재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화해치유재단은 해산이 불가피하다고 통보했다. 아베 총리가 정상회담 자리마다 빠짐없이 위안부 합의 문제를 반복적으로 제기하자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최후통첩'성 경고를 던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후 한일 정상이 더는 무릎을 맞댈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오사카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조차 한일 정상 간 양자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문 대통령과의 한일 정상회담을 거부한 아베 총리는 G20 정상회의 폐회 5일 만에 한국으로의 반도체 핵심 소재 3가지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전격 발표했다. 문 대통령의 분리 대응 원칙을 깨고 기어이 과거의 한일 역사 문제를 현재의 무역 문제로 끌어온 것이다.

그동안 기계적으로 반복해왔던 자신의 말에 진정성이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었다. 현재 새로운 무역 문제를 발생시켜서라도 과거 역사 문제를 '힘의 논리'를 통해 해결하고 넘어가겠는 것이었다.

한일 간 미래지향적 새로운 관계 구축을 희망한다는 말은 '관계 발전'이 아니라 '관계 악화'를 의미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른바 '파괴적 관계'를 통해 새롭게 동북아의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100년 전 누렸던 제국주의 침략의 일본 역사를 가장 화려했던 시절로 보고 그 당시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아베 정권의 의도는 '일본회의의 정체'(율리시즈·아오키 오사무 저) 속에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비단 최근 화제가 된 이 책과는 무관하게 아베 정권이 꿈꾸는 과거로의 회귀를 위해서는 패전국의 역사를 지우는 작업이 우선해야 하는데, 문 대통령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무역 보복이라는 최악의 카드를 꺼낸 것이라고 대다수 학자들은 평가한다.

'로키(low-key)로 일관하던 문 대통령이 침묵을 깨고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것도 아베 총리의 이러한 속셈이 확인된 뒤였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4일 일본 NHK 방송 인터뷰에서 "한일은 청구권 협정에 의해서 (과거사에 대해)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한국이) 유감스럽게도 그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며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배경이 역사 문제에 있다는 것을 실토한 바 있다.

실언을 가장한 계획된 망언이었을 수 있다. 문 대통령은 나흘 뒤인 8일 수석비서관·보좌관 회의 모두발언에서 "우리 정부로서도 필요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일본 측의 조치 철회와 양국 간의 성의 있는 협의를 촉구한다"고 수출규제 철회를 촉구했다.

일주일 뒤 같은 자리에서 "우리 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이라며 경고 수위를 한 층 높인 문 대통령은 급기야 일본의 2차 경제 보복 조치가 이뤄진 지난 2일 전면전을 선포했다.

문 대통령은 "무모한 결정", "명백한 무역보복", "분명히 경고", "이기적인 민폐행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 등 동원 가능한 최고 수위의 표현으로 아베 정권을 직격했다.

문 대통령이 정제된 '외교 언어'가 아닌 거친 '정치 언어'를 직접적으로 구사한 것은 2018년 1월18일 이후 처음이다.

당시 문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검찰수사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 보복"으로 규정하자 분노의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문 대통령은 "이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직접 거론하며 정치 보복을 운운한 데 분노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사용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단어를 동원해 강도 높게 비난했다. 또 "마치 청와대가 정치 보복을 위해 검찰을 움직이는 것처럼 표현을 한 것은 우리 정부에 대한 모욕"이라고도 했다.

평소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문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분노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한 두 사건 속에는 '보복'과 '적반하장'이라는 키워드가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가해자가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적반하장'의 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당한 통치행위를 '보복'으로 부정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2일 "가해자인 일본이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큰소리치는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 위에서 풀이된다.

'정치인 문재인'이 아닌 '인간 문재인'으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폭력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으려 할 때'라고 언급한 대목은 대선 전 발간한 인터뷰집 '대한민국이 묻는다(21세기북스·문형렬 엮음)'에 소개돼 있다.

문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일제강점기 시절 위안부 내지는 강제징용을 통해 휘둘렀던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폭력에 대한 반성 없이, 또 미래관계 발전을 위해 아픈 과거사 문제는 잠시 덮어두자는 끊임없는 자신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제적 보복을 자행하는 것을 보며 분노했을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아베 총리의 '실언'을 가장한 계획된 '망언'을 계기로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문 대통령의 '8·2 선언서'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불교계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순리에 따라 나오게 된 필연적 반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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