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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칼럼] 친일을 뉘우친 이들만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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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8-16 05:30:00  |  수정 2019-08-16 18: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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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호경 정치부장 = 광복절에 문재인 대통령 경축사 관련 기사들을 한창 출고하다 문득 포털 실시간 검색어가 눈에 들어왔는데 실검 1위가 대통령 경축사가 아니라 '암살'이었다. 웬일인가 찾아보니 SBS에서 영화 '암살'을 특별 편성해 방영하고 있었다.

지난 2015년 개봉 당시 이 영화를 관람하고 후유증이 며칠 갔던 기억이 났다. 완성도에서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았지만 소재 자체가 희귀해서 임팩트가 강한 작품이었다. 종전까지 시대물이라고 할만한 우리나라 영화 중에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넘치도록 양산돼왔지만 가까운 식민지 시절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그것도 친일파와 항일투사의 대립구도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를 본 기억이 없었다.

이런 영화가 왜 그렇게 희소했을까 생각하며 아무래도 정치적 이유나 언론 마케팅 등에서의 위험 부담 탓에 충무로에서 친일파를 다룬 시나리오가 터부시 되는 암묵적 분위기가 형성돼 왔던 게 아닌가 짐작하기도 했다. (실제 몇몇 중앙일간지는 '암살' 관객 수가 1000만을 돌파할 때까지 이 영화를 일절 기사화하지 않거나, 종북좌파 운운하는 칼럼 소재로나 다루곤 했다.)

최동훈 감독은 예상되는 여러 공격들을 고심하며 대중성이라는 방패를 구축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서도 관객에게 일정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곳곳에 메타포를 깔아놓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은 듯한데, 인상적인 장면이 여럿 있었지만 필자에겐 특히 염석진의 마지막 대사가 뇌리에 와 박혔다.

왜 동지를 배신했느냐고 안옥윤이 싸늘하게 묻자 염석진이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았으면 그랬겠나?"라고 히스테리컬 하게 대꾸하는 대목이다.

반민특위에 체포돼 구속된 뒤 "까마득하던 조국의 광복이 뜻밖에 얼른 실현됐다"고 한탄했던 최남선의 '자열서(自列書)' 한 구절을 연상케했다.

요즘 신(新)친일파니 토착왜구니 하는 거친 논란을 떠올리며 이 장면에서 새삼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기나긴 식민 상태에서 나라를 되찾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다만 해방 이후에라도 참회나 사죄, 최소한의 자기성찰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른바 친일파들이 이웃과 동족을 배반한 각자의 부역행위에 대해 죄과를 인정하고 진솔하게 뉘우치는 과정이 있었던들 건국 초기 이래 이 나라의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친일파라고 모두 막무가내로 후안무치했던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개중엔 자신의 과오를 절절히 토로하고 처벌받기를 당연시한 인사들도 있었다.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최린이 대표적이다. 그는 3·1 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한 뒤 변절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회장,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등으로 복무하며 친일파의 거두가 됐고 미영(美英)타도연설회 등지에서 "나는 과거를 모두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다"고 부르짖곤 했다.

그는 반민특위 법정에서 재판장이 변절 이유를 추궁하자 "기미년 당시 일제에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 후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며 "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침통하게 고백했다. 이어 최린은 다음과 같이 절규해 재판부와 방청객 등 법정 안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죄를 진 나 같은 놈은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민족 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

일제 때 군수 및 총독부 관료를 지낸 현석호는 충남도 광업부장으로 일하던 중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정 육군 대령이 충남지사로 부임하자 "나는 일제에 협력한 고급관리로서 친일파이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며 당시 지사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제2공화국 장면 정부 시절 내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자서전을 통해 거듭 참회한 바 있다.

"해방되던 날부터 나는 친일 관리로서의 거취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나 개인으로서는 양심적으로 부끄러운 일은 없지만 일정 때 고급관리로서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일과 출세를 위해 힘쓴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해방과 독립이 일본의 패망과 미국의 승리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궁극적인 원인이 조선 민족의 독립을 위해 3·1 운동을 비롯한 국내외의 투쟁에서 뼈를 갈고 피를 뿌린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공로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 같은 사람은 참으로 죄스럽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일제 때 군수를 지낸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의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자신이 관료로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사죄했던 그는 1980년 1월 26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나를 손가락질 해다오'라는 제목의 참회록에서 내면의 고통을 자학하듯 털어놨다.

"나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오래 안일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욕망은 하필 오늘의 나의 철학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내가 만고불멸의 철칙으로 알고 내려온 나의 확신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이 확신을 저주합니다.

나는 한일합방 때에 절개를 지킨 애국자의 자손들이 곤궁하게 살고 있는데 친일파의 자손이 지금까지도 잘 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일제시대에 그들에게 아부한 사람들이 잘 살았고, 그 자손들이 좋은 교육을 받아 지금까지도 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바로 그 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우리나라에 진정한 학문이 없고 진정한 교육이 없는 것은 모두 나와 같은, 파렴치한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깊이 참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기를 결심도 합니다.

그러나 이 결의가 과연 얼마나 오래갈는지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심한 건망증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다시 그 더러운 처세철학을 소생시켜 추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동료들은 나를 꾸짖어 주시고 제자들은 나를 손가락질 해 주기를 바랍니다."

일제 때 교사(훈도) 생활을 했던 김남식이 서울 청량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며 소회를 밝힌 퇴임사도 감동적이다.

"저는 민족 반역자입니다. 저는 일제시대 때 우리 한글을 말하지 말라고 아이들한테 가르쳤고,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라고 독려하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그러고도 이제까지 교단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해방 직후 반민족 처벌이 있었다면 저는 분명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이런 부끄러운 삶을 살았지만 여러분은 자랑스런 교사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김남식은 참회의 뜻으로 여생 동안 자신이 거주하던 회기동 경희대 앞 일대 거리를 매일, 하루 종일 청소했다고 한다. 민족반역자로서의 죗값을 치러야 한다며 한두 달도 아니고 2010년 작고할 때까지 무려 30년 넘게 '넝마주이'를 자처한 것이다.

최린, 현석호, 이항녕, 김남식 같은 이들만 있었다면 이 나라가 광복 74주년에 이른 오늘날까지 '친일파의 후예'니 '토왜(土倭)'니 하는 잡음으로 공동체 구성원들 간 분열을 되풀이하는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흔히 거론되듯, 부역자 수만 명을 단죄함으로써 이후 반민족 행위에 대한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철저히 차단했던 중국과 프랑스의 사례가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 시절에 친일 안 했던 사람이 어디 있느냐" "당시 친일파를 청산했으면 나라 운영이 안 됐을 것"이라는 반론도 종종 제기되는데, 이는 친일파 개념을 오도하는 일종의 물타기 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제헌국회는 헌법 제101조에 친일반민족 행위자 처단을 위한 근거를 마련하고 1948년 8월 16일부터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안'을 상정·심의했는데, 숱한 토론과 협의 끝에 다수의 합의로 통과시킨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한일 합방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에 조인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한 자 등이었다.

그 대상이 일제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던 대부분 백성이나 소극적으로 방조했던 사람들이 아닌 극소수라는 얘기다. 실제로 반민특위가 당초 조사 대상자로 삼았던 인물은 대략 7000명이었고, 검찰에 송치한 숫자는 559명에 불과했다. 반민특위가 더 활동했다고 하더라도 그 수는 법 규정상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근래 기준으로 봐도 2005년 발족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에서 결정한 숫자는 1006명이고, 2009년 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4776명이 실려 있다. 2005년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기준에 대해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한 행위'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 등 상세하면서도 제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이나 징용에 대해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간 것"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약 8개월간 실시됐고, 그 이전 1939~44년에 실시된 '모집'과 '관알선'은 법률 강제성이 없었기 때문에 응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피해자들 주장은 전부 검증되지 않은 거짓말"이라는 주장도 쏟아진다.

지난 2010년 당시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강제동원조사위)에서 확보하고 있던 피해자 200여 명의 구술록을 검토하고 직접 인터뷰도 여럿 했던 필자로서는 기가 막힌 이야기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공포를 전후해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아소 등 당시 전범기업 모집책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탄광 노동 등에 혹사당했던 이들 사연을 잘 알고 있는 사학자들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가령, 이 분야 대표적 전문가인 정혜경 박사는 여러 저서를 통해 왜 '모집'이나 '지원'이 아닌 '강제'인가, 철사 줄에 꽁꽁 묶여 질질 끌려가지 않고 제 발로 걸어서 갔다 하더라도 왜 분명한 강제이고 자유의사와 상관없었는지를 실증적으로 낱낱이 규명하고 있다.

조선 내지(內地)의 일제 방적공장으로 끌려가 참혹한 노동환경에서 학대 당하던 10대 소녀들 사연을 담은 <봄날은 간다-방적공장 소녀, 징용>에서 저자인 정혜경 박사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고통스러웠다. 방적공장에 동원된 열 살 내외 소녀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소녀의 죽음을 묘사하는 대목을 쓸 때에는 심장이 뛰고 손이 벌벌 떨렸다. 아무리 '이건 다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일 뿐, 지금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마음을 다잡아도 멈출 수 없었다.

후회했다. 처음으로 후회했다. 일본이 저지른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한반도 군수공장에 동원된 소녀들의 실태에 관심을 가진 것을 후회했다. 강제동원 연구자임을 후회했다…."

피해자들의 각종 구술록을 살펴보면 불과 17, 18세에 노무자로 끌려 가 하루아침에 부모 형제와 작별한 사례를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12, 13세의 어린이도 포함됐다. 요컨대 전시체제기 조선에서는 노동력 강제동원 정책에 따라 청장년층은 물론 노인·아동·남녀를 가릴 것 없이 동원됐으며, 일제가 부르짖었던 이른바 '일가총동원(一家總動員)'의 실현이 구체화됐다.

일제의 만행은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지만 대부분 문맹이거나 문필 능력을 갖추지 못한 처지로 이름 없는 들풀처럼 스러진 민초들이기에 식민지 백성의 통한과 사적인 체험을 본인이 직접 기록으로 남긴 사례는 많지 않다. 그중 류시욱의 '산중반월기'(山中半月記·산속에서 쓴 보름간의 일기)는 가족과 고향을 그리는 미칠듯한 심정을 신음처럼 써 내려간 수기(手記)다. 그는 독립운동에 가담해 서대문 형무소 및 사상범교화소에서 복역하다 1942년 일제의 산업보국대에 끌려가 머나먼 사할린에서 탄광 노역을 했고, 3만 명 안팎의 다른 사할린 징용자들과 마찬가지로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 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어찌 내 유치한 붓끝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어머니! 하고 불러만 보아도 어머니 슬하를 가보지 못하는 몸이라 가슴속에서는 붉은 핏덩어리가 또 한 번 꿈틀거리며 심지어 뿌드득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언제 갈지 기약 못하는 몸이나 제발 갈 때까지 돌아가시지 말고 살아만 주셨으면 죽어도 한이 없으련만. 아, 고향아! 한오리의 신작로여 내 언제쯤이면 정답던 너를 밟을 수 있으며 어머니의 품속에 안길 수가 있겠니?

이 잘난 조국으로 말미암아 서대문 형무소요 사상범 교화소요 징용이요 하는 까닭에 자식 노릇도, 형 노릇도, 동생 노릇도, 애비 노릇도 못하는 일을 생각할 때 속이 상하고 화가 막 치밀어 오르는구나! 우리들도 개나 돼지가 아니고 사람이란다. 우리들의 인간으로서의 이 권리를 어느 놈이 빼앗으려고 하느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살아 있어서 내 육체의 한 부분인 그대들을 꼭 찾고야 말 것이리라!"

최근 부쩍 기세등등하게 주창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은 어떤가. 이에 대해서는 실증을 빙자한 당대 통계의 왜곡과 견강부회식 해석 등에 관해 사학계의 숱한 반박이 존재하지만, 이미 1920년에 황성신문 주필 박은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동시대 일본 측 논리를 조목조목 지적한 내용이 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3·1운동 때까지의 피맺힌 독립운동과 처절한 항거 사건들로 점철돼 있는데, 일본에 의한 물질적 개발과 진보론의 허구에 대해서도 길게 거론한다.

"혹시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인이나 일본인은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은 이후 생활 경제가 전보다 퍽 좋아졌다고 말할지 모른다. 우리들도 또한 이미 많이 들어오던 바이다. 크게 요약하여 말하면 도로 개량, 배수 사업의 발달, 교량 건설, 철도 부설, 전신 가설, 황무지 개척, 식림 사업 등이 그런 것이다. 이런 발전은 물론 일본인의 노력에 의한 것임을 한국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이 이로 인하여 약간의 이익을 받은 것은 단지 부수적이고 우연한 것일 뿐이다. 물질상의 개발은 실로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일본인을 위한 것이라고 바로 말할 수 있다. 저들 당국의 이런 개발은 일본의 이익을 위하거나 혹은 한국인의 이익 획득을 우려하여 음으로 좌절시키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설령 한국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이루어진 물질적 발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실권을 장악한 사람은 모두 일본인이다. 농업 면에서 이전보다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좋은 밭과 비옥한 땅은 모두 관영인 동양척식회사 소유이다. 최대의 삼림은 모두 일본인 조합의 소유이다. 황무지 개간으로 매년 생산액이 적지 않지만 모두 일본인 은행의 금고에 들어가고 있다. 도회지 등지에서 무역에 종사하는 자로 거대한 상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은 모두 일본인이다."

역사학자 김기협은 "국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에는 허점이 많다. 이 사건이 민족사회의 발전을 위해 다행한 것이었다는, 상식에 역행하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라며 "강간으로 임신한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고 하자. 여자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의 존재를 고맙게 여기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해서 강간한 남자에게 감사할 일은 아니다. 아름다운 연꽃이 더러운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것도 바랄 수 있다. 그러나 폭력에 의해 잉태된 아이가 잘못된 길로 자라날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더 조심스럽게 키울 필요가 있다. 이 아이의 이름이 '근대화'다"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직업상 매일 주요 일간지를 비롯한 언론의 각종 보도와 칼럼을 접하면서 근래 아베 정권의 간교하고 난폭한 행태에 더해 자생적으로 벌어지는 온갖 추태들을 함께 목도하게 된다. 때로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다수 시민들의 위기의식과 저항의지를 감정적이고 분별없는 짓으로 매도하며 냉철하라고 훈계하기도 한다. 이성적 분노를 냉소하는 그 이면에 일제강점기를 호도하고 친일을 희석하며 아베를 양해하는 함의를 발견하기도 한다. 100년 전의 민초, 의병, 독립운동가들 심경이 관념이 아니라 실재로서 다가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백범 김구는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선조들의 무수한 희생 끝에 독립해서 일궈낸 대한민국이다. 제74주년 광복절을 보내며 오늘 하루나마 외세에 맞서 광야에서 울부짖고 돌베개를 벤 채 밤을 지새웠던 선조들을 생각한다. 이웃나라의 침탈을 막지 못해 개인의 자유와 재산과 문화와 말까지 빼앗겼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 후손에게 욕된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던 선조들의 단호한 결의도 되새긴다. 1944년 학도병 장준하가 일제 관동군 부대에서 탈출해 광복군을 찾아가던 여정은 지금 읽어도 뭉클하다. 광복절이 새삼 소중하다.

"우리는 목욕을 마치고 군복을 입었다. 서로서로를 돌아보며 새 결의를 다짐했다. 조국 광복, 이 깊고 긴 강처럼, 크고 깊고 긴 일을 마침내 나는 찾아낸 것이다. 우리는 동북쪽의 조국을 향하여 경건하게 머리를 숙였다. 김준엽 동지, 윤경빈 동지, 김영록 동지, 홍석훈 동지, 그리고 나, 이렇게 차례로 서서 조국을 향한 배례를 한 것이다.

머리가 깊이깊이 숙여져 내려가기만 했다. 두고 온 산, 강, 뛰놀던 고향이며 부모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욱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윽고 머리를 들었을 때는 모두 눈물을 가득 머금어 아침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우리 다 같이 애국가를 부릅시다!'

불로하 강변에 애국가가 퍼졌다. 강물 따라 흘러흘러 그 장엄한 애국가의 여운은 물살을 지으며 불로하 깊은 강심으로 스며들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목메인 애국가는, 이 다섯 청년의 가슴을 울리면서, 산 설고 물 선 중국 땅에 한국의 언어를 뿌려놓았다. 끝내 울지 않고는 후렴을 부를 수가 없었다. 아 조국이란 진정 이런 것이냐……."


■ 참고문헌


장준하, <돌베개>, 세계사, 1992.
박은식 지음·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김기협,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돌베개, 2010.
정혜경, <조선 청년이여 황국 신민이 되어라>, 서해문집, 2010.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책보세, 2011.
정혜경, <봄날은 간다-방적공장 소녀, 징용>, 선인, 2013.
류시욱 지음·방일권 옮김, <오호츠크해의 바람>, 선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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