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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단독 3·1독립선언, 하동에서 나왔다···박치화 기록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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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9-20 09:56:04
임정 법무원 법률판리사 겸 경남도찰리사·재무모집기주원
생가복원·공훈비 건립, 문화재 등록 추진 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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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대한독립선언서, 2015년 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 독립기념관 소장
【하동=뉴시스】김윤관 기자 = 경남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1919년 3월 하동에서 지방 유일의 독자적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선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한 일산(一山) 박치화(1880∼1947·하동군 적량면)가 3·1운동 이후에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친 사실을 확인했다.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박치화의 후손이 제공한 자료,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박치화 신임장과 통지서에서 선생의 활약상이 담긴 내용을 3·1운동 100년 만에 확인했다고 20일 밝혔다.

문건을 분석한 정 소장은 “1927년 10월 상하이 임정에서 선생에게 수여한 신임장과 통지서는 법무원 법률판리사 겸 경상남도찰리사와 임정 재무모집기주원 등의 직책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라고 전했다.

 박치화의 종손자 박명신(85·부산시 남구 용호동)씨의 자료 제공과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문서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

선생은 1919년 3월14일 하동군 적량면 면장직을 돌연 사직하고, 지방 유일의 독자적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3월18일 하동장날 장터에서 12인이 함께 선포, 영호남 지역민 1500여명과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했다.

이 독립선언서로 인해 하동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총 17회가 일어났으며, 연인원 1만2000∼1만4000명이 참여했다. 17명 사망, 95명 부상, 50명이 투옥됐다.

하동 대한독립선언서는 2015년 국가지정 기록물 제12호가 됐으며,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선생에 관한 기록은 일제가 작성한 판결문(1919)과 고등경찰관계적록(1936) 등에서 알 수 있다.

 ‘적량면 박치화 수모자(최고지도자)는 3월18일 하동읍 장날을 이용해 시장 내에 쌓아둔 판매용 소금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구한국기(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모여든 군중 1500여명과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했다. 하동경찰서에서 20여명이 출동해 수모자를 검거하고 진압했다’는 것이 당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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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박치화 신임장, 법무원 법률판리사겸 경상남도찰리사와 임시정부 박치화 재무모집기주원 통지서, 1927, 독립기념관 소장
이 일로 선생은 일본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도 기백은 꺾이지 않았고 당당하게 항일의지와 대한독립을 외침으로써 민족 지도자로서의 기개와 위엄을 보여 일본판사도 감동했다고 전해 온다.

 진주법원 판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하고 석방하려 했으나 검사가 형이 낮다며 2심법원에 공소해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1945년 8월15일 국권을 회복하자 선생은 민족지도자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1947년 7월5일 지금의 전북 김제시 청하면 대청리에서 괴한의 흉탄을 맞고 순국했다. 선생의 나이 68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대전국립현충원 제4묘역 117호에 안장했다. 아우 박문화에게는 1998년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제3묘역 470호에 안장했다.

윤상기 하동군수는 “이번 문건 발굴은 박치화 선생의 생가복원과 근대문화유산 등록, 공훈비 건립, 독립기념관 건립, 하동 대한독립선언서 문화재 등록에도 탄력을 받을 것”이라며 “연내에 그가 태어나고 살아온 마을에 박치화 지사 공훈비를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kyk@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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