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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선언, 시작은 망년회"…日취조기록 첫 공개

등록 2019.10.01 15: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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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형사소송기록 내 '출판법 위반' 부책 문헌

2·8 독립선언 서명자 9인 취조 및 재판 기록 등

학우회 망년회 시작→조선청년독립단으로 발전

1919년 2월8일 선언…일제 경찰 들이닥쳐 해산

민족문제연구소, 4일 학술대회서 국내 첫 공개

【서울=뉴시스】

【서울=뉴시스】 100년 전인 1919년 2.8독립선언을 발표해 출판법을 위반한 혐의로 금고형을 받은 조선 유학생들의 진술서가 일본의 한 전문도서관에서 발견됐다고 도쿄신문이 29일 보도했다. 사진은 자료의 일부. <사진출처=도쿄신문> 2019.03.29

【서울=뉴시스】심동준 기자 =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벌어진 '2·8 독립선언' 실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자료 일부가 국내 학술대회에서 공개될 예정이어서 주목받고 있다. 독립선언 서명자에 대한 취조 기록 관련 내용을 분석한 것인데, 이름과 선언 전후 행적 등이 담겨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1일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에 따르면 일본 도쿄변호사회·제2도쿄변호사회 합동도서관 소장 형사소송기록 속에 포함된 '출판법 위반' 부책에는 2·8 독립선언 서명자 취조기록 관련 내용이 담겼다.

부책은 선언자 9명에 대한 1919년 2월8일 일본 니시칸다경찰서 청취서, 1919년 2월10일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 청취서, 1919년 2월10일 공판시말서와 기소사실, 1919년 2월13일 공판시말서 제1회와 1919년 2월15일 공판시말서 제2회로 구성됐다고 한다.

일제 취조 기록에 남아있는 2·8 독립선언 서명자 이름은 최팔용, 김도연, 김철수,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송계백, 김상덕, 서춘 9명이다. 독립선언에는 이광수와 최근우까지 모두 11명이 서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광수는 선언 발표 시점에 중국 상하이에 있었고 최근우는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돼 불기소 처분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취조 기록 속에 있는 서명자 진술 등은 향후 2·8 독립선언을 자세히 분석할 수 있는 객관적 사료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받는다. 그간 2·8 독립선언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개인 회고 등을 토대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자료를 분석한 와세다대학 대학사자료센터 미야모토 마사아키(宮本正明)씨는 문헌 속 진술 등을 토대로 2·8 독립선언 전후 상황을 재구성 했다. 취조기록 등에 담긴 문언이 국내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2·8 독립선언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2월8일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남녀 학생들이 조국 독립을 선언한 학생운동이다.

미야모토씨 분석에 의하면 발단은 1918년 12월29일 조선유학생학우회(학우회)의 망년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논의는 망년회에서 시작해 웅변회를 거쳐 조선청년독립단 성립으로 이어진다.

구체적인 행동은 1919년 1월6일부터 8일까지 있었던 회합에서 시작됐다고 평가된다. 처음에 위원은 10명이었는데 이후 논의 과정에서 김철수, 이광수가 들어오는 등 변동이 있어 현재 알려진 2·8 독립선언 서명자 11명이 확정됐다.
【서울=뉴시스】 대정 8년 보안법 사건 문서철. 함경도 지역 3·1운동 관련자 기소를 위해 이시카와 검사가 작성한 개인 기록으로 '이시카와 자료'로도 불린다. 2019.10.01 (사진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서울=뉴시스】 대정 8년 보안법 사건 문서철. 함경도 지역 3·1운동 관련자 기소를 위해 이시카와 검사가 작성한 개인 기록으로 '이시카와 자료'로도 불린다. 2019.10.01 (사진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독립선언 문안은 주로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이광수, 김철수 5명이 만들었다. 최팔용이 요점을 정리한 뒤 이광수가 초안을 작성했으며, 검토와 보정을 거친 뒤에 다시 이광수가 정서를 했다. 이광수는 원안이 완성된 직후 일본을 떠났다는 설명이다.

1919년 2월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는 200~300명이 모였고 학우회 임원에 의한 결산보고 도중인 오후 2시30분께 위원 9명의 긴급동의를 제출하면서 2·8 독립선언이 이뤄졌다.

이후 일제 경찰이 오후 3시께 들이닥쳐 해산명령을 하고, 위원 등을 연행하면서 대회는 강제 종료됐다. 당초 이들은 대회 이후 회원들과 함께 제국의회로 행진해 일본 정부와 제국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할 예정이었다.

2월10일 일제 경찰은 위원 10명을 출판법 위반 혐의로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 검찰은 9명을 기소했다. 공소사실은 조선독립 기운을 높이기 위해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용의 문서를 집필, 인쇄, 배포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2월13일 비공개로 열린 1회 공판에서 금고 8개월~1년6개월의 구형이 이뤄졌고 2월15일 일제 법원은 금고 8개월~1년6개월을 선고했다. 항소심은 3월21일 위원 2명에 대해 금고 1년형을 9개월로 감형하는데 그쳤다. 상고는 6월26일 기각됐다.

미야모토씨는 4일 한국에서 2·8 독립선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등 취조기록 등을 분석한 내용을 공개할 계획이다. 민문연은 2·8 독립선언 서명자 취조기록과 함께 함경도 지역 3·1운동의 실상을 담은 이른바 '이시카와 자료' 관련 내용에 대한 학술대회를 4일 오후 1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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