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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훈의 [월담] 누가 미당의 이마를 짚을 것인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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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10-10 10:00:00  |  수정 2019-10-21 09:40:48
모스크바에서 미당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들
'쏘냐의 찌린내'마저 시로 쓴 미당
오장환에 대한 시를 쓰지 않은 이유
영광, 오욕 다 품어야 청사(靑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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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
【서울=뉴시스】정철훈문화부장 =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장의 고민도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청산, 그건 불가능한 명제다. 단어로써만 존재하는 추상성일 뿐, 살아있는 동안엔 누구도 자신의 과오를 청산할 수 없을 뿐더러 타인의 과오도 청산할 수 없다. 법을 들이밀어도 그건 법에 의한 청산일 뿐, 인간 내면의 깊은 골짜기에 뿌리박힌 과오와 뼈아픈 후회는 도저히 청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말인데, 그때 미당에게 묻고 싶었다. "선생님은 1990년과 1992년, 두 차례에 걸쳐 모스크바를 방문했음에도 그곳을 거쳐간 오장환에 대한 시를 왜 한 편도 남기지 않았습니까?"

그건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은 아니었다. 입 안에서 빙빙 돌며 소용돌이치는 나만의 의문이자 의문의 발효였을 뿐이다. 미당은 상당수의 인물시를 남겼지만 그건 전래적 농촌공동체의 정서나 민족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재로써의 인물시였다. 아무 인물이나 붙들고 시심을 낭비하지 않는 그의 미적 잣대는 완고했다.
예컨대 '상가수(上歌手)의 소리' 같은 작품이 그의 대표적 인물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질마재 상가수(上歌手)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 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喪輿)면 상여머리에 뙤약볕 같은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상가수(上歌手)는 뒤깐 똥오줌 항아리에 똥오줌 거름을 옮겨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명경(明鏡)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습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 좋게 밀어넣어 올리는 쇠뿔 염발질을 점잔하게 하고 있어요. 명경(明鏡)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미당 서정주, '상가수(上歌手)의 소리' 전문)

질마재 상가수 쯤이 아니면 시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을 하면서도 미당과 오장환이라는 두 존재의 조합이 자꾸 파도처럼 철썩대는 건 무엇인가.

오장환(1918∼1951)은 스무 살 때인 1938년 서울 관훈동에 고서점을 열었다. 이름이 ‘남만서점(南蠻書店)’이다. 당시 고서점 이름으로 유행하던 ○○당(堂)도 아니고, 서점 이름에 많이 들어가던 ‘문(文’)이란 글자도 없이 문자 그대로 ‘남쪽 오랑캐 서점’이다. 이름이 이상했던지 문우 이봉구(1916∼1983)는 이런 글을 남겼다.

 "장환이 경영하고 있는 책점은 남만서점이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서점 진열장에 놓인 흰 토끼털 위엔 보들레르의 시집 원서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울긋불긋한 무당의 큰 부채가 놓여 있고 정면 벽에는 포오의 사진과 연필로 그린 이상(李箱)의 자화상이 걸려 있어 이채를 띄었다."(이봉구, 「도정(道程)」에서)

 오장환은 왜 서점 이름을 남만서점으로 지었을까. 나는 대략 이렇게 짐작해본다. 오장환이 1936년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도쿄에 ‘남만서점’이 있었다. 그 서점은 ‘러시아 대혁명사’ ‘코민테른의 성립과 발전’ 등 좌익서적을 펴내 발매금지를 당했을 정도로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처였다. 그런 만큼 사회주의 사상을 이해하고 수용한 오장환이 귀국 후 서점을 열면서 의식적으로 그런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오장환은 부친 오학근의 사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37년 가을 귀국, 물려받은 유산으로 남만서점을 열었다. 남만서점은 문학전문서점이었다. 보들레르 시집 원서는 물론 절판·한정판·호화판·진귀본이 꽉 들어차 있었다. 게다가 선배 시인 이상(1910∼1937)이 1936년 말, 일본으로 가면서 오장환에게 건넨 이상의 연필 자화상까지 걸어놓고 문학전문서점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

휘문고 재학 중 스승인 정지용에게 사사하며 교지에 시를 발표한 오장환은 1933년 <조선문학>에 시 ‘목욕간’으로 등단했고, 바로 그해 이상이 종로통에 문을 연 다방 ‘제비’에 드나들면서 이상과 친교했다. 만 15세의 오장환은 너무 성숙했다. 딴은 이상이 1937년 도쿄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오장환이 이상의 자화상을 서점에 걸었던 것은 추모의 의미였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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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뉴시스】김기준 기자 = 한국 아방가르드 시단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오장환(1918∼1951) 시인의 알려지지 않은 시들이 최근 잇달아 발견돼 문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사진은 청년 시절의 오장환 시인.2015.02.10.(사진=보은군청 제공)  photo@newsis.com
남만서점을 가득 채운 책들은 당시 경성제대교수 미야케(三宅)의 부인이 하던 고서점과 관련된다. 미야케가 사상문제로 투옥됐을 때 부인은 남편의 개인 장서를 가지고 서점을 열었는데 그 부인과 알고 지내던 이봉구를 따라 오장환 역시 그 서점에 자주 출입을 했다. 그러니 오장환이 남만서점을 경영할 때 미야케 부인의 자문도 어느 정도 받았을 터다. 남만서점은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고객은 줄을 이었다. 수입도 많아서 오장환은 멋진 양복과 넥타이를 사흘 건너 바꿀 정도였다. 이봉구는 이렇게 회고했다.

 "학교고 무엇이고 문학으로 인하여 모두 팽개치고 동경으로 드나들며 색깔 진 양복과 넥타이에 그 좋아하는 시집 중에 진본, 호화판, 초판 등을 사들이었고 운니동 집에서 눈만 뜨면 아침밥을 먹기가 무섭게 우리들이 모이는 ‘미모사’ ‘낙랑’ ‘에리사’로 뛰어나왔고 이곳에서 해가 저물어 거리에 밤이 오면 제가끔 주머니에서 돈을 털어 모아 춘발원 배갈집으로 향하여 밤 이슥해서 집으로 찾아들어 아무 방이고 닥치는 대로 들어가 코를 골았다. 문학을 위하여 사는 보람에서 도취되어 장환은 살아 나왔다."(위와 같음)

서점의 호황은 출판으로 연결됐다. 당시엔 서점이 출판을 겸업하는 예가 많았다. 오장환은 ‘남만서방(南蠻書房)’이란 출판사를 등록한 뒤 자신의 두 번째 시집 『헌사』와 김광균(1914∼1993)의 첫 시집 『와사등』을 1939년 차례로 출간한다. 그러나 갓 스무살 오장환은 출판을 천직으로 삼기엔 너무 젊었다. 결국 남만서점은 1940년 문을 닫고 만다. 이봉구는 “일 년도 못 가 ‘남만서방’은 들판에 나고 오장환은 도쿄로 떠나버렸다”고 회고했다.

남만서점 시절 오장환의 근황을 알 수 있는 게 그가 1940년 7월에 쓴 산문 「팔등잡문」이다.
 "오늘도 명치정엘 나와 당구를 하며 콩가루 섞인 커피를 마시며 어떠면 지방 문청(文靑)이나 올라와서 어떻게 인사할 기회를 얻어 가지고 맥주나 마실까 맥주나 마실까…"라고 쓴 것을 보면, 서점 경영은 2년 남짓으로 끝내고 이내 전형적인 식민지 청년의 룸펜의식으로 휘청거리는 한때를 보냈던 것이다.

 오장환은 술이나 밥이 나올 데를 찾는 데 선수였다.
서정주와 이봉구 등 신진문인들을 이끌고 문학청년을 외아들로 둔 토건업자를 찾아가 술을 청했는가 하면, 사설병원의 약장을 열어 알코올에 물을 타 술 대용으로 마시기도 한 술판의 좌장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종로나 본전통 맥주집 주인들과도 교분이 두터움은 물론 그곳의 웨이터들, 남자 접대부인 ‘오동갈보’들과도 형님 동생하고 지내는 사이여서 맥주 한 병 값을 주고도 두세 병을 주인 몰래 마실 수 있었다. 오장환은 하는 일도 스마트해서 서정주 이용악 이봉구와 바(BAR)에 들어설 양이면 여급들이 떼거리로 달려와 팔과 가슴에 매달렸다고 한다.

 술집 주인들도 그를 좋아해서 외상술을 즐겁게 내주었다. 자연스럽게 오장환 패거리로 불릴 만큼 한 무리 가난한 시인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오장환은 대장 노릇을 했다.

오장환은 당시 ‘시인부락’ 동인이기도 한 미당의 시에 홀딱 반해 갓 신인인 데다 시도 몇 편 되지 않음에도 불구, 미당에게 첫 시집을 ‘남만서방’에서 내자고 제안한다. 시 원고는 1938년에 건네진다. 하지만 1940년 미당이 만주로 떠나고 남만서점도 문을 닫는 등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시집 출간은 미뤄졌다.

그러던 차에 ‘시인부락’ 동인이기도 한 남대문약국 주인 김상원이 500원을 내놓아 1941년 2월 10일 100부 한정판으로 미당의 첫 시집 ‘화사집’이 남만서고에서 출간될 수 있었다. 오장환이 마음만 먹었다면 '화사집'은 이보다 2년 전에 출간됐을 것이다. 미당은 첫 시집이 2년 늦게 출간된 저간의 사정을 오장환의 탓으로 돌리며 섭섭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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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오장환 시집 '붉은 기'
충북 보은군 회북면에서 해주 오씨 오학근과 어머니 한학수 사이에서 태어난 오장환은 친모가 오학근의 첩이었던 관계로 서자의 슬픔을 안고 세상을 출발했다.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의 본처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적출이 된 오장환. 그는 자신의 출생에 시대적 과제를 보탬으로서 해묵은 족보를 거부하고 무산계급을 추종하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1946년 3월 말 신장염으로 입원한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한 오장환은 1947년 6∼7월 문화공작단으로 활동한다. 남조선 문화단체총연맹 소속 8개 단체 예술가 200명 가운데 일원이 돼 전국방방곡곡을 돌았던 그는 이 순회공연의 목적을 수기 ‘남조선의 문화예술’에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에서 더욱이 비등된 민주 역량과 이를 축하하기 위함”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문화예술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테러가 자행되면서 당한 집단구타와 신장염으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오장환은 1947년 하반기에 월북, 평안남도 남포소련적십자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나의 병실 남으로 향한 창에는/ 해풍이 조을고/ 부두 앞으로 나아간 곡물창고/ 여기에 모이는 참새떼는/ 자주 나의 창에 앉았다 갑니다// (중략)// 이럴 때이면 오랫동안 비꾸러진 나의 마음이/ 몰래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내 고향 먼 곳에 계신 어머니시여!/ 당신이 목마르게 그리워집니다”(「남포병원」 부분)

 이후 소군정의 배려로 모스크바 볼킨병원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그의 모스크바 행에 대해선 아직까지 속 시원히 밝혀진 게 없다. 유일한 단서가 1950년 5월 북한에서 발행된 그의 다섯 번째 시집 『붉은 기』이다.

『붉은 기』에 수록된 시편을 분석하면 오장환은 1948년 12월 열차 편으로 하바롭스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1929년 외국의 간섭군과 싸워 하바롭스크를 사수한 인민영웅 김유천 거리를 둘러본 뒤 ‘하바롭스크 크라이(구역) 콤(코뮤니스트) 강사실’에 유숙하며 항공 스케줄을 기다리다가 이윽고 32인승 항공편으로 시베리아 상공을 날아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볼킨병원 입원 기간은 1949년 1월부터 7월까지로 추정된다. 그는 신장 투석을 받았을 것이다. 신장 기능이 50% 내지 25%로 저하됐을 때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받아야 하는 게 신장 투석이다. 고질적인 신장병 환자인 오장환은 장기간에 걸쳐 신장 투석을 받는 동안, 전해질과 요독을 정상적으로 배출하지 못해 몸이 붓는 부전증세를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신장 투석이 없는 날에는 모스크바 시내를 자유롭게 활보했다.

 『붉은 기』에 수록된 시 「레닌 묘에서」의 창작 일자는 1949년 3월, 「올리가 크니페르」는 1949년 2월로 적혀 있다.

 "레닌 묘에서 이른 새벽에서 밀려드는 끝없는 사람의 물결은 아 오늘도 당신을 뵈오러 모여온 사람들! 굳게 잠겨진 사람들의 마음 암흑의 창문을 열어주신 당신이시여! 이 가슴 피 끓는 그것이 곧장 인민의 품으로 치닫게 한 당신이시여! 동방의 먼 나라 지금은 젊은 민주국가의 한 청년이 당신을 뵈오러 이 자리에 왔습니다 아 오늘에도 대리석 침상에 조용히 쉬시는 거룩한 모습 레닌이시여! 당신은 인류의 양심, 인류의 지혜, 그리고 인류의 영광, 당신 계시는 이 고요함"(오장환, '레닌의 묘에서' 도입부)

그는 입원 중에도 짬을 내어 붉은 광장의 레닌 묘를 찾아가고, 작가 안톤 체홉의 부인이자 소련 인민여배우 올리가 크니페르의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모스크바예술극장을 찾아갔던 것이다. 「고리키 문화공원에서」 「김일성 장군 모스크바에 오시다」 「모스크바의 5·1절」 등의 시에는 현장감이 물씬 풍긴다.

 이제 눈을 감고 오장환을 떠올리면 그는 모스크바 볼킨병원 침상에 누워 러시아어판 『예세닌 시집』을 읽고 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혹은 새벽에 잠이 깬 그의 눈동자는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를 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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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체홉과 그의 아내이자 소련인민배우 올리가 크니페르
“어머니는 쓰고 계신다-/ ‘형편이 되거들랑 너, /크리스마스주간에 말이다/ 한 번 오너라/ 나한테 목도리를/ 아버지한테 바지를 사다 다오./ 우리 집은 여간 옹색하지가 않구나.// 네가 시인이라는 것이,/ 네가 좋지 않은 평판과/ 어울리고 있는 것이/ 나로서는 여간 뜨악하지 않구나./ 어렸을 적부터/ 쟁기질이나 하여 밭을 가는 것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을’// (중략)// 나는 편지를 마구 구깃거리고,/ 나는 오싹 소름이 끼침을 느낀다./ 그래 내 가슴 속에는 숨겨진 길에는/ 출구가 없는 것인가?/ 그러나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나는 나중에 이야기하리라./ 나는 말하리라/ 답장의 편지로…”(박형규 번역, 예세닌 서정시집 『자작나무』에서)

 오장환은 한국판 예세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0월 혁명의 와중에서도 사회주의적 일체감보다 농민들의 서정적 진실에 경도됐던 예세닌과 오장환의 시를 비교해 읽으면서 종종 시대착오를 일으키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두 시인의 애절함이 여전히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오장환은 불과 31세에 숨을 거뒀기에 망정이지 만약 장수했다면 북한에서 김일성찬양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오장환은 해방 전후 카프계열의 경향문학에 경도되긴 했지만 빼어난 서정시를 남긴 서정의 족보에 이름이 드높은 시인이다.

다시 마당으로 돌아오면, 미당은 오장환보다 50년 뒤늦은 1990년, 모스크바를 찾았고 미당의 발자국은 공교롭게도 반세기 전, 오장환이 밟았던 발자국과 겹쳐 있다. 비록 오장환에 대한 시는 쓰지 않았지만 미당의 웅숭깊은 눈은 오장환의 그림자라도 찾을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을지도 모른다. 
 
미당은 1990~1992년에 걸쳐 <구 공산권 기행시> 9편을 남겼다.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구 소련, 그리고 중국을 둘러본 소회를 시로 쓴 것이다. 그 가운데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시편이 있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모스코로 날아가는/ 러시아비행기 안에서 러시아 맥주를 마시고/ 화장실엘 들어갔더니/ 아 그 우리네 옛날만 같은/ 또 우리네의 시골만 같은/ 찐한 찌린내가 온몸에 풍겨들어서/ <야! 이건 도스도예프스키의 찌린내구나! 그 죄와 벌 속의/ 쏘냐의 찌린내구나!/ 마음에도 없는 괴로운 매음을 당하고/ 뒷간에 갔을 때의 바로 그 쏘냐의 찌린내구나!"('부다페스트에서 모스코로 날아가는 러시아여객기 화장실 속의 비행기의 그 찐한 찌린내' 일부)

미당은 모스크바 남쪽의 도모제도보 공항에 내려서 관광을 시작했을 터. 나 역시 1991년 도모제도보 공항에 내려 항공기를 갈아탄 적이 있었다. 그때 대합실에 앉아 미당의 '찌린내' 풍기는 이 시편을 떠올리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아에로플로트 항공기 화장실에 갔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등장하는 쏘냐의 지린내에 대한 시는 남겼을지언정 단짝 문우였던 오장환에 대해서는 시 한편 남기지 않은 미당의 심중이란 무엇인가. 미당에게 있어 오장환은 쏘냐의 지린내 정도로는 치환할 수 없는 뼈아픈 기억의 주인공이라고 된 말인가. 어쩌면 미당은 해방 정국에서 자신을 친일파로 몰아부친 오장환을 모스크바에서 정서적으로 환기시키기가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시쳇말로 미당은 지나가는 과객(過客)이었고 오장환은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의료지원을 받으며 볼킨병원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조국 건설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강자였던 것이다. 반면 미당은 모스크바에 펄럭이는 '붉은 기'의 위력에 기가 질린 관광객이었을 뿐이다. 미당이 소년 시절에 일어로 읽었던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뇌리에 박힌 러시아와 소련의 가상 이미지였으니 정작 현실사회주의 소련에 가서도 그의 로망은 성숙되지 않았다.

 "'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무덤을 찾아갔더니/ 이분 사진의 수염처럼/ 더부룩한 잡초만이 자욱할 뿐,/ 나무로 깎어 세운 碑木 하나도 보이지는 않습디다./ 2백50만 마지기의 땅을/ 농민에게 모조리 그저 노나주고/ 자기는 손바닥만한 碑石 하나도 없이/ 풀들과 새, 나비들과 바람과 하늘하고만 짝해서 누었읍디다/ '참 잘했다 영감아!' 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그래도 올려옵디다."(서정주 '레오 톨스토이의 무덤 앞에서'-1992.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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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화사집' 14.5㎝x23.3㎝ 1941년 발간
1992년이면 나 역시 모스크바에 체류할 때다. 쪼들리는 유학시절에 생활비라도 벌어볼 참으로 그 가을에 관광객 통역 겸 가이드로 '야스나야 폴랴나'를 두어 차례나 찾았던 것인데, 미당은 나보다 두어 달 앞서 그곳을 다녀갔으니 1999년 세기말을 앞두고 미당을 찾아갔을 때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때는 "오장환만은 잃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했던 해방 정국의 순진한 미당이 아니었다. 전두환 찬양 발언에 편승해 친일에서 파쇼로 전향한 문단 권력의 중심이었으니 1990년 혹은 1992년 그가 만약 모스크바에서 오장환과 조우했다고 해도 그를 빨갱이로 몰아부쳤을지언정 오장환에 대한 시는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카프 계열의 경향파 문학을 철저하게 외면했던 미당은 분단 이후 남한의 여러 독재정권을 거쳐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또다른 경향파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보면 미당만큼 정치권력에 쉽게 승복하는 예도 드물 것이지만 미당의 제자들은 이를 두고 미당의 호방함으로 미화하기도 한다.

오장환이 언제 어디에서 러시아어를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1946년 6월 서울 동향사에서 『예세닌 시집』을 번역 출간했을 만큼 그는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1949년 가족과 함께 북으로 간 시인 조운(1900∼?)은 시집 『붉은 기』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장환이 소련에 다녀왔다. '나는 언제나 한번 가보나!’하고 모두들 동경하는 소련에 다녀온 장환이 여장을 풀면서 우리들 앞에 선물로 내놓은 것이 이 시집이다. 장환의 소련행은 우리 공화국을 대표한 사절도 아니요 문화연구를 위한 시찰도 아니요 호화로운 만유(漫遊)나 우정의 시를 지으려고 간 것은 더욱 아니다. 우방의 한 젊은 예술가에게까지도 알뜰히 관심을 놓치지 않는 위대하고도 자애로운 소련은 우리들의 아끼는 장환, 이 젊은 시인의 병이 다스리기 어려운 중세임을 알자 고쳐주려고 데려간 것이다. 위대한 소련이 예외의 우우(優遇)와 분에 넘치는 온정에 장환은 병구를 이끌고 모스크바의 품에 안기었던 것이다. -1950년 5월.”

하지만 오장환은 1951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한국전쟁 중 오장환과 우연히 조우했던 김광균 시인에 따르면 그는 북으로 가서도 감시 대상이었다. 보위부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들러 보고를 받고 있어 감옥살이하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는 것이다.

어쨌든 오장환은 1949년 8월,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크라스노야르스크를 거쳐 평양으로 귀국했고 그로부터 41년이 지난 1990년 미당은 아에로플로트를 타고 모스크바-김포 항로를 거쳐 서울로 귀국했다. 그로부터 9년 뒤 나는 미당을 찾아갔지만 흉중의 질문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러니 미당에 관한한 나는 아직 21세기에 진입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저 공룡같고 꽃 같기도 한 20세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따는 이 모든 비화는 분단에서 시작되었음이 틀림없다. 오장환은 북으로 갔고 미당은 남에 남았다. 이 또한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장의 고민일 것이다. 남한문학은 그렇다하더라도 북한문학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오장환이야 충북 보은군 후원으로 문학상까지 운영되고 있으니 남한의 문학인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해도 한설야, 홍명희 같은 월북문인이나 재북문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문학관은 과연 그들을 어느 정도, 어느 수준에서 안배해야 할 것인가. 이런 복잡한 질문과 논의점의 출발에 미당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마칠 때다. 미당을 오늘에 소환한 것은 친일의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것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본질도 아니다. 살아 있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과오를 청산할 수 없을진대, 미당만을 콕 집어 한국문학의 청산대상으로 올려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대신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미당의 이마를 짚을 것인가.'

청산할 수 없는 게 역사이고 그걸 청사(靑史)라고 부른다. 미당이며 북한문학까지 모두 담아내야 그게 균형잡힌 청사다. 영광과 오욕을 다 품어야 청사다. 그렇지 않소, 미당 영감! 

2000년 12월 24일 미당의 부고를 접했을 때 나는 일주일 전 단행된 편집국 인사로 인해 문화부에서 방출되어 국제부 야간 당직을 서고 있었다. 넘겨다 보니 문학담당을 물려받은 후배는 정신없이 자료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몇 가지 자료를 후배에게 넘긴 뒤 편집국을 빠져나왔다. 드문드문 가로등만 켜진 쓸쓸한 아스팔트에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부고기사 한 줄도 보태지 못한 소회가 암울했다. 따는 죽음에 무엇을 더 보탤 것인가. 이런 젠장! 서러움도 아니고 울분도 아닌 뭔가 비위가 상해 도로변 눈더미를 발로 툭 찼을 때 알게 되었다. 나의 20세기도 미당과 더불어 끝났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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