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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대통령님, 영화 '82년생 김지영' 관람 어떠세요

등록 2019.11.09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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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대통령님, 영화 '82년생 김지영' 관람 어떠세요


【서울=뉴시스】김태규 기자 =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반응이 뜨겁다. 헐리웃 블록버스터 사이에서 박스오피스 최상위권을 열흘 넘게 유지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KOBIS)에 따르면 누적관객 283만명(11월7일 기준)에 달한다. 30대 후반 여성의 삶을 통해 남성중심 사회의 부조리함을 다룬 영화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영화는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 살고 있는 평범한 여성의 고민을 담고 있다. 결혼·출산·육아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꿈을 포기해야만 하는 여성의 현실을 스크린에 옮겨 놓았다. 딸이기에 무조건 포기해야 했던 많은 누나들,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의 끈적한 시선에 몸서리 쳐야하는 여자친구들, '독박육아'에도 모자라 '맘충이' 취급을 받아야 아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치마가 짧은 게 문제', '학원을 멀리 다닌 게 문제', '웃음을 먼저 흘린 게 문제', '창피함도 모르고 바바리맨을 경찰에 신고한 게 문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부조리함을 디테일하게 담아낸 자기 고백적인 장면들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억울함을 평생 속으로 삼켰던 주인공이 때로 친정 어머니로, 때로는 외할머니로 빙의(憑依) 되어서야 하고싶은 말을 쏟아낼 수 있던 장면은 묵직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동명의 페미니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3년 전 먼저 출간돼 100만부 이상 판매됐다. 고(故) 노회찬 의원은 2017년 5월19일 5당 원내대표 초청 오찬 회동 때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당시 노 원내대표는 "어제 광주에서 유족 한 분 안아 주셨듯, 우리 사회의 가장 즐비한 82년생 김지영들을 안아주십사 하는 뜻에서 전달드린다"고 선물의 취지를 밝힌 바 있다.

고인이 된 그가 언급했던 광주에서의 일은 문 대통령이 취임 일주일 만에 맞이한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둥이' 김소형씨를 따뜻하게 안아줬던 장면을 말한다. 문 대통령은 당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 짓던 소형씨를 무대 위로 직접 올라가 포옹으로 위로했다. 깊은 울림을 줬던 문 대통령의 공감 능력을 토대로 온기있는 청년 정책을 당부한다는 의미가 노 의원의 선물 속에 담겨 있었다.

2년 뒤 같은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문 대통령의 변화된 시선은 올 여름 청와대 직원들에게 선물했던 책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문 대통령은 90년대생을 하나의 특정한 세대(generation)로 정의한 책 '90년대생이 온다'를 선물했다. 인구통계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세대를 규정하고, 학술적 연구와 체험적 문화를 바탕으로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화제가 됐던 책이다.

타인의 아픔에 쉽게 공감하며 삽겹살과 소주로 장수 '공시생'을 위로했던 기존 문 대통령의 시선과는 다소 결이 다른 선택으로 여겨졌다. 수많은 국내·외 현안 속에서 빠른 정책 결정을 내려야 하는 국정 최고지도자의 입장을 책 선택에서 읽을 수 있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해외순방 도중 전용기에서 정혜신 박사의 신간 '당신이 옳다'를 읽은 것을 계기로 자신의 공감 능력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다고 토로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당시 페이스북에 "공감과 소통이 정치의 기본이라고 늘 생각해 왔지만, 내가 생각했던 공감이 얼마나 얕고 관념적이었는지 새삼 느꼈다"는 반성의 글을 공유했다.

문 대통령이 '조국 국면'을 거치면서 '공정'을 다시금 국정 운영의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고 한 배경에는 그동안 놓쳤던 '공감' 능력을 회복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참모들은 얘기한다. 국민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해 사회적 진통을 막지 못했다는 반성의 인식 위에서 공정사회 실현 약속이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 관람은 문 대통령에게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어 보인다. 페미니즘 정부를 표방하고도 정책적 뒷받침이 이어지지 않아 아쉽다는 진보 진영 목소리를 경청하고 있다는 메시지도 함께 담을 수 있다.

공감에는 약물 치료보다 더 빠르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정혜신 박사의 말처럼 조국 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펑펑 울어서 인터뷰도 못했다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관람 이후 문 대통령에게 가장 인상 깊은 영화 중 하나로 남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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