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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 화가 김정헌 '어쩌다 보니...어쩔 수 없이'

등록 2019.11.18 14: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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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미술관에서 초대전 2020년 1월5일까지

【서울=뉴시스】김종영미술관, 김정헌 초대전

【서울=뉴시스】김종영미술관, 김정헌 초대전


【서울=뉴시스】김정헌 작가노트 = 어쩌다 보니..... 아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몇 년 전 미국에 갔을 때 그 유명한 예일대에 구경 갔다가 거기에 있는 미술관에서 본 사진 작품엔 차도르를 입은 수 십 명의 중동 여인들이 얕은 강을 빈손으로 건너고 있었다. 그때 그 여인들은 ‘어쩌다 보니’ 그 강을 건너는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건너는 것일까? 그 우연과 필연 사이를 오가는 의문이 지금까지 나를 쫓아다니고 있다.

모든 그림들은 이 ‘우연과 필연’ 사이의 우주적 변증법이다. 모든 사건은 아니 모든 현상은 이 ‘어쩌다 보니’와 ‘어쩔 수없이’ 사이를 오가는 변증법의 소산이다. 나의 그림들은 특히 그렇다.

살면서 우리는 수 없이 많은 사람과 사건과 세상을 만난다. 그냥 지나친 그 많은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또는 '어쩔 수 없이'만나고 헤어진다. 쌩떽쥐베리가 우연히 사막에서 어린왕자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내가 미술을 하게 된 것도 ‘어쩌다 보니’ 미술을 만난 것이고 또 ‘어쩔 수없이’ 이 미술을 영위하고 산다. 반은 우연이고 반은 필연이다.

미술 중에서 ‘그림’은 특히 세상을 비추는 창이다. 이 그림이라는 창을 집안의 어디 벽면에 걸어두면 또 하나의 세상이 우리를 비추고 있는 셈이다. 아주 신비로운 일이다. 이 창을 통해 세상을 올곧게 비추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좋은 세상’이 이렇다는 것은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극락세계가 다른 곳이 아니다. 바로 그림쟁이들이 만들어 낸 세상이 우리의 ‘이상세계’인 극락일 터이다.

【서울=뉴시스】김종영미술관, 김정헌 초대전이 2020년 1월5일까지 열린다

【서울=뉴시스】김종영미술관, 김정헌 초대전이 2020년 1월5일까지 열린다


어쩌다 보니 또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그릴지라도 우리 위에 떠 있는 ‘달’처럼 이왕 뜬 김에 많은 사람들의 속사정을 헤아려 그려 봐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 지구라는 별에 사는 인간들에게는 별의별 사연이 다 깃들어 있다. 이 사연들은 우주를 몇 바퀴 돌아도 끝나지 않는다. 이 사연들을 그림쟁이들이 조금이라도 같이 풀어 나간다면 우리는 ‘너와 나’ 즉 ‘우리’들의 공동체에 같이 살아갈 의미와 재미가 있지 않을까?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대부분 산업화의 과정을 거쳐 이제 페기 된, 또는 페기 될 쓰레기 같은 것들을 많이 그렸다. 특히 이번 전시는 사진작가 조춘만이 찍고 기계미학의 대가인 계원대 이영준교수가 해제한 독일의 중공업지대 ‘풸링겐 산업의 자연사’라는 책에서 영감을 받아 대형작업을 몇 점 시도한 바 있다. 또 그의 안내로 당인리 화력 발전소를 견학할 수 있었는데 이런 대형 중공업 기계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산업화 과정을 거친 우리의 사회를 시각적으로 다시 한번 성찰하는 기회를 가졌다.

산업화의 대형 시설과 기계들이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는지 모르지만, 이 사회는 ‘어쩌다 보니’, 또 ‘어쩔 수 없이’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탄소 문명’과 산업화로 이룬 ‘성장시대’가 끝났다고 진단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내가 그려 온 많은 그림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잡다한 생각들의 결과물들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와 사회가 혼란스럽고 나의 삶의 언저리가 잡다하기 때문에 나의 생각들도 ‘잡다’하다.

생각의 파편들이 널뛰기를 하고 옛날 기억들을 소환해 현재와 미래의 일에 두서없이 연결시키기도 한다. 또 반대로 과거를 되 살려 현재와 미래를 환치하기도 한다. 삶의 변두리와 낯선 곳을 헤매기도 하고 가끔가다 정치적인 욕망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모든 생각들은 혼란스러워 거의 정신분열증에 가깝다.

【서울=뉴시스】김종영미술관, 김정헌 초대전

【서울=뉴시스】김종영미술관, 김정헌 초대전


내 작품들의 대부분은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연결돼 있는 잡다한 시대적 과제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적으로도 그렇지만 형식적인 표현 방법들도 각양각색이다. 표현 내용에 따라 그 방법을 그때그때 달리 사용했으니 그 결과물들도 잡다할 수밖에 없다.

잡초, 백제의 산경문전, 산동네, 도시, 나의 가족들, 농부, 농촌, 마을, 동학농민혁명, 김남주와 정희성의 시, 역사 이야기, 파편화된 삶의 이미지 등 많은 주제들이 등장하고 그리는 방법들도 그때그때 달랐다.

붓으로 직접 묘사하기만이 아니라 의인화, 패러디, 혼성모방,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티커나 신문들을 오려 꼴라쥬하기, 만화베끼기, 이미지의 겹치기나 충돌 등의 방법으로 모든 상징과 비유를 총동원한다.

이번 전시는 가능하면 나이 들면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치르는 전시회가 되지 않도록 제법 노력을 한 편이다. 아무리 작가가 노력한 티를 내도 결국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관객들에게 작품을 완성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드린다.

【서울=뉴시스】김정헌, '봄의 소리' 2019

【서울=뉴시스】김정헌, '봄의 소리' 2019


김정헌 초대전= 서울 평창동 조각전문 미술관 김종영미술관에서 매년 가을, 한국미술의 지평을 넓히는데 헌신한 원로 작가를 선정해 여는 전시다.

서양화가 김정헌(73)은 1980년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한 이래 지금도 그림을 통해 시대를 살피고 있다. 1946년 5월 평양출생으로 작가는 자신을 ‘진짜 해방둥이’라고 부른다. 두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월남한 작가에게 격랑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실과 발언' 창립 회원으로 1980년대 미술운동을 해왔다.민족미술협의회 대표, 문화연대 대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고, 최근 4·16 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현재 가평 작업실에서 꾸준히 창작활동에 매진하며 삶과 미술 언어의 지평에 관해 실천적인 탐구를 이어오고 있다.

김종영미술관은 "급변하는 미술계속에서도 한결같이 문사철(文史哲)에 몰두하며 화가로, 교육자로, 그리고 시민 사회활동가로 문화사회를 이룩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전시는 해방둥이로 우연인 듯 필연 같았던 화가 김정헌의 40여 년간 화업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2020년 1월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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