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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필름]스필버그가 만든 아는 맛…'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록 2022.01.12 05:02:00수정 2022.01.12 09:4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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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필름]스필버그가 만든 아는 맛…'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뉴욕, 밑바닥 인생, 사랑, 원수, 폭력, 죽음, 화해, 용서. 1957년 초연한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이런 단어들로 요약되는 작품이다. 이 매혹적인 키워드에 노래와 춤이 절묘하게 배합돼서일까. 이 이야기는 60년이 넘는 세월에도 낡지도 않고 여전히 살아숨쉰다. 이 뮤지컬의 모티브가 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불멸의 걸작이라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역시 이 시대의 클래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런 소재를 놓칠리 있나. 1946년생으로 어느덧 커리어 황혼기에 접어든 그는 마치 자신의 말년을 대표할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 뮤지컬을 택한 것 같다. 캐스팅 작업에만 1년이 걸렸다는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만든 이유를 "사랑은 언제나 의미 있는 주제이며, 분열 또한 오늘날 중요한 주제다. 지금이 이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온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월12일 개봉)는 동명 뮤지컬을 영화로 만든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영화는 1961년에 제작됐었다.
[클로즈업 필름]스필버그가 만든 아는 맛…'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영화는 익숙하고 선명하다. 1950년대 뉴욕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Upper West Side)의 링컨 스퀘어 슬럼가가 배경이고, 시기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과 링컨 센터가 만들어지기 전 재개발이 이뤄지던 때다. 이 구역 주도권을 두고 폴란드계 갱 '제트'와 푸에르토리코계 갱 '샤크'가 극렬히 대립 중인데, 제트의 핵심 멤버 토니(앤설 엘고트)와 샤크 리더 베르나르도의 동생인 마리아(레이철 지글러)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모두가 다 아는 바로 그 얘기. 하지만 아는 맛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숱하게 봤던 이야기인데도 이 금지된 사랑이 만들어내는 비극엔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 있다.

어쨌든 볼거리가 차고 넘친다. 70년 전 맨해튼 거리가 완벽에 가깝게 재현돼 있어 러닝타임 내내 생기를 느낄 수 있다. 시대를 반영하면서도 제트와 샤크를 구분하기까지 하는 각기 다른 분위기의 의상을 보는 재미도 있다. 물론 압권은 역시 노래와 춤. 뮤지컬 음악의 두 전설 레너드 번스타인과 스티븐 손드하임이 함께 만든 뮤지컬 넘버가 영화 OST로 온전히 되살아나는 경험은 짜릿하다. 출연 배우들이 수개월 간 연습해 완성한 안무는 마치 아이돌 댄스 그룹의 군무처럼 한 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는다.
[클로즈업 필름]스필버그가 만든 아는 맛…'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오프닝과 체육관 댄스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명장면이다. 재개발 탓에 황폐해진 슬럼가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해 제트와 샤크가 대립하는 상황을 자막 한 줄 넣지 않고 10분이 채 안 되는 오프닝 시퀀스로 단번에 보여주는 테크닉은 과연 스필버그라는 감탄을 자아낸다. 제트와 샤크 멤버 전원이 한 공간에 모여 '맘보'에 맞춰 춤추는 체육관 댄스 장면도 압권이다. 이 시퀀스는 두 집단이 일촉즉발의 갈등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걸 춤으로 상징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너무 젊기에 싸울 수밖에 없고 그래서 결국 파국을 마주하는 그들의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를 압축시켜 표현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클래식이 될 수 있었던 건 이 작품이 단순한 비극적 러브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종·계층 문제 등 미국 사회의 해묵은 과제가 녹아들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소통과 대립, 용서와 화해라는 보편적 메시지도 담고 있다. 스필버그는 갈등의 표면적 원인인 인종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제트와 샤크 모두 사회적 약자라는 걸 두 집단을 중재하는 공권력(경찰)의 무능함을 통해 은근히 드러낸다. 샤크 멤버들의 스페인어 대사에 일부러 자막을 달지 않아 소통의 문제를 에둘러 짚어내기도 한다.
[클로즈업 필름]스필버그가 만든 아는 맛…'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장점이 많은 영화이지만, 단점 역시 적지 않다. 150분에 달하는 긴 러닝 타임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최대 약점이다. 상영 시간이 긴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의 시간을 써야 하는 이유를 관객에게 설득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러닝 타임이 180분에 달하는데도 길다는 지적이 나오지 않는 '드라이브 마이 카' 같은 사례도 있지 않나. 하지만 스필버그는 왜 150분이 필요했는지 납득이 될 만한 이유를 영화 안에서 풀어내지 못한다. 노래와 춤 등 뮤지컬 퍼포먼스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늘렸다는 인상이 강한데, 이는 뮤지컬 장르 특유의 성긴 스토리 라인과 결합해 극이 늘어진다는 느낌마저 준다.

남자 주인공 토니를 연기한 앤설 엘고트의 존재감이 미미하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엘고트는 앞서 다양한 영화에서 각기 다른 매력을 보여준 재능 있는 배우이지만, 토니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춤·노래 실력이 압도적이지도 않고,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96)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처럼 관객을 휘어잡을 치명적 매력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말하자면 모범생 같은 모습을 한 엘고트의 토니는 관객이 기대하는 세상과 불화하는 반항아 토니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클로즈업 필름]스필버그가 만든 아는 맛…'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미국 현지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신뢰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비평 사이트 '메타크리틱'에서 이 영화 점수는 85점으로 최고 수준이다. 물론 이 작품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갖췄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미국 언론의 이같은 고평가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향한 미국 사회의 편애 같은 게 있어 보이기도 한다. 미국 사회를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부른느 것처럼 이 영화도 온갖 게 다 들어간 멜팅 팟 같은 영화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어떤 향수도 없는 한국 관객이 이 영화를 봤을 땐, 그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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