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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는가', 이토록 매력적인 악인을…'황정민 리차드3세'[이 공연Pick]

등록 2022.01.16 06:00:00수정 2022.02.07 09:4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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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연극 '리차드3세' 리차드3세(글로스터 공작)역의 배우 황정민이 지난 13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프레스콜을 하고 있다. 2022.01.13.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연극 '리차드3세' 리차드3세(글로스터 공작)역의 배우 황정민이 지난 13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프레스콜을 하고 있다. 2022.01.13.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강진아 기자 = '아는가. 그대는 아는가. 그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짙은 어둠이 깔리고 무대를 압도하는 목소리의 여인의 뒤로 툭 튀어나온 굽은 등에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황정민이 등장한다. 움츠러든 왼손에 앞쪽으로 쏠려있는 몸은 걸을 때마다 기우뚱한다. 왕좌를 향한 눈빛은 번뜩인다. 비극이 벌어지는 이 무대의 주인공, '리차드3세'다.

뒤틀어지고 구부정하게 숙인 몸을 내내 유지하며 리차드3세의 옷을 완벽하게 입은 황정민은 4년 만의 재공연에서 또다시 빛을 발한다.

100분간 극을 이끌어가며 황정민에 의한, 황정민을 위한 극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영화 속에서 보던 배우는 무대를 만나 더 생생해진다. 냉정하고 잔혹하면서도 익살스럽고 애처로운 모습은 그만의 매력적인 악인을 만들어낸다. 공연이 끝난 후 무대 정중앙 어둠 속에서 절름발이로 달려 나오는 모습은 마지막 순간까지 리차드3세 그 자체다.
[서울=뉴시스]연극 '리차드3세' 공연 사진. (사진=샘컴퍼니 제공) 2022.01.15.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연극 '리차드3세' 공연 사진. (사진=샘컴퍼니 제공) 2022.01.1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1400년대 영국, 랭거스터가를 몰락시키고 전쟁에서 승리한 요크가의 맏이 에드워드4세가 왕위에 오르며 모두 새 시대를 축하한다. 하지만 그곳에 에드워드의 막냇동생 리차드 글로체스터의 자리는 없다. 전장에서 앞서 싸웠지만 그림자 취급당하는 현실에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겠노라며 왕관을 향한 은밀한 계획을 드러낸다.

리차드는 왕위를 노린다는 소문을 퍼뜨려 둘째 형을 죽이고, 음모인 줄 모르고 충성스러운 동생을 죽게 했다는 충격에 에드워드4세도 세상을 뜬다. 이후 황태자를 왕위에 올리려는 엘리자베스 왕비의 친인척과 총리도 하나둘 올가미에 걸려 숙청된다. 가족들의 원수인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는 미망인 앤까지 왕좌의 장식품처럼 손에 넣는다.

수많은 이들을 죽게 하면서 그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진 않는다. 일그러진 몸을 더 웅크려 경계를 피하고 동정을 받고, 거짓을 늘어놓으며 그 뒤에서 조력자들 손을 빌려 음모와 계략을 실행한다.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킥킥대며 즐기는 듯한 모습으로 죄의식 없는 희대의 악인을 보여준다.
[서울=뉴시스]연극 '리차드3세' 공연 사진. (사진=샘컴퍼니 제공) 2022.01.15.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연극 '리차드3세' 공연 사진. (사진=샘컴퍼니 제공) 2022.01.1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하지만 단순한 악인은 아니다. "애초에 나를 사랑하는 자는 이 세상에 없었다"며 어둠 속 구석에 있는 자신을 태양으로 끌어내 스스로 길을 개척하겠다고 외치는 그에겐 처연함이 엿보인다. 주변의 외면과 무시는 그에게 결핍과 욕망을 심었고, 그 마음도 뒤틀린 몸처럼 만들었다.

그렇다고 악행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피로 얻은 것은 피로 잃는다"며 요크가에 의해 가문이 몰락당하고 미치광이로 전락한 마가렛 왕비의 저주처럼, 리차드 역시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가 죽인 이들의 영혼이 한데 몰려드는 악몽에 시달리며 "악인은 잠들지 않는다"고 처절하게 맞서지만, 어김없이 예언대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고전의 가장 큰 매력인 말맛이 살아있는 무대다. 셰익스피어 특유의 시적인 표현과 주옥같은 대사들이 귀에 꽂힌다. 지금도 변치 않는, 시대를 관통하는 묵직한 메시지는 고전의 힘을 단단하게 보여준다. 화려함보다 배우들에게 집중하게 해주는 무대로, 극의 마지막엔 숨겨져 있던 뒤편의 아득한 어둠이 드러나 입체감을 더한다.
[서울=뉴시스]연극 '리차드3세' 공연 사진. '마가렛 왕비' 역의 정은혜. (사진=샘컴퍼니 제공) 2022.01.15.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연극 '리차드3세' 공연 사진. '마가렛 왕비' 역의 정은혜. (사진=샘컴퍼니 제공) 2022.01.1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악인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유머도 섞여 있다. 진지하지만 우스꽝스러운 모습 등 재치를 한 숟갈 넣어 웃음을 자아낸다. 영상을 통해 죽음을 효율적으로 표현했지만, 괴리감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극단 출신인 장영남과 윤서현도 안방극장이 아닌 무대로 오랜만에 만난다. 이번 공연에 새로 합류해 리차드3세의 형수로 남편이 죽고 그에게 소중한 아이들을 잃게 되는 엘리자베스 왕비와 리차드3세의 큰형이자 요크가의 황제 에드워드4세로 분한다.

특히 극의 처음과 끝을 책임지는 마가렛 왕비 역은 초연부터 함께한 국립창극단 출신 소리꾼 정은혜가 맡아, 카리스마있는 강렬한 목소리로 존재감을 뚜렷이 보여준다. 오는 2월13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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