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물의 철학에 그려낸 셰익스피어 비극…창극 '리어'[이 공연Pick]

등록 2022.03.29 05:30: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서울=뉴시스]국립창극단 '리어' 공연 사진. '리어' 역의 소리꾼 김준수. (사진=국립창극단 제공) 2022.03.28.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국립창극단 '리어' 공연 사진. '리어' 역의 소리꾼 김준수. (사진=국립창극단 제공) 2022.03.2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강진아 기자 = "상선(上善)은 약수(若水)일러니 만물(萬物)을 이(利)로이 하되 다투지 아니하고 모두가 저어하난 낮은 곳에 처(處)하노라."

어두운 조명, 징검다리 돌과 물가의 형상을 한 무대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물이여 그 멀고 먼 길"을 노래하는 이들은 거울을 보듯 잔잔한 수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 속에 백발에 흰수염의 노(老)왕 리어가 관객들을 향해 나지막히 말한다.

리어는 자신의 권력과 부를 내려놓고 물처럼 낮은 곳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전에 딸들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려 하며 욕심을 부린다. 첫째 거너릴과 둘째 리건은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갖고 있다며 듣기 좋은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만, 막내 코딜리어는 진실된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침묵한다. 이에 분노한 리어는 막내 코딜리어를 내쫓고 그 비극적 운명이 시작된다.
[서울=뉴시스]국립창극단 '리어' 공연 사진. (사진=국립창극단 제공) 2022.03.28.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국립창극단 '리어' 공연 사진. (사진=국립창극단 제공) 2022.03.2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이 창극으로 재탄생했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른 국립창극단의 '리어'는 '리어왕'을 우리 말과 소리로 새롭게 풀어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서양의 대표적 고전은 동양 철학을 만나 한데 어우러졌고, 절절하고 깊은 우리 소리로 표현돼 그 비극적 색채와 메시지를 더욱더 농도짙게 보여준다.

작품은 시간이라는 물살에 휩쓸려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려낸다. 극의 두 축인 리어와 세 딸, 글로스터와 두 아들의 관계를 담은 원작 이야기를 그대로 따르지만, 동양의 정서가 더해져 색다른 맛을 낸다. 창극을 위해 새롭게 극본을 집필한 배삼식 작가는 삶의 비극과 인간에 대한 원작의 통찰을 물(水)의 철학을 담고 있는 노자의 사상과 엮어냈고, 대사와 노래는 동양적인 미(美)를 뽐낸다.
[서울=뉴시스]국립창극단 '리어' 공연 사진. (사진=국립창극단 제공) 2022.03.28.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국립창극단 '리어' 공연 사진. (사진=국립창극단 제공) 2022.03.2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극을 꿰뚫는 소재인 물은 무대 세트로 꾸며져 시선을 끈다. 폭 14m와 깊이 9.6m 크기의 세트에 채워진 20t의 물은 무대 자체를 하나의 '물의 세계'로 그려낸다. 경쟁하듯 효심을 외쳤던 두 딸은 권력을 쥐자 리어에게 등을 돌렸고, 그 일그러진 욕망으로 수면은 일렁인다. 배반과 음모, 분노와 저주 등 갈등과 다툼이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 속에 인물들은 물을 휘젓고 다니거나 헤치고 나아가며 요동치는 그들의 심리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 고요를 위하여 이 적막을 위하여, 그 모든 소란이 필요했던가."
[서울=뉴시스]국립창극단 '리어' 공연 사진. '글로스터' 역의 소리꾼 유태평양. (사진=국립창극단 제공) 2022.03.28.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국립창극단 '리어' 공연 사진. '글로스터' 역의 소리꾼 유태평양. (사진=국립창극단 제공) 2022.03.2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비극의 마지막 순간, 막내 코딜리어의 진심을 깨달은 리어가 허탈하게 내뱉는 이 한마디는 긴 여운을 남긴다. 물은 고요해지지 않으면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다. 잔잔하게 흐르기만 할 것 같은 물은 둑이 터지면 넘치고, 절벽에서 떨어지면 한순간 흩어지며 또 얼어붙었다가 녹아내리며 변화무쌍하다.

나이든 왕의 역할을 31살의 젊은 소리꾼 김준수가 맡았지만, 손색이 없다. 리어로 변신한 국립창극단 간판 스타 김준수는 호소력 짙은 소리로 삶의 끝자락에 몰려 처절하고 회한이 가득한 한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을 밀도있게 그려낸다. 글로스터 역의 유태평양을 비롯해 리어의 세 딸로 분한 이소연, 왕윤정, 민은경 등 열다섯명의 소리꾼들은 감정선을 건드리는 섬세한 소리를 들려준다.

화려한 창작진만큼 음악도 매력적이다. 거문고, 가야금, 대금, 아쟁, 생황 등 국악기와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등 서양악기, 신시사이저 등 전자음까지 다채로운 음악으로 극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창극 '귀토' 등의 한승석이 작창 및 음악감독을, 영화 '기생충'·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이 작곡을 맡았다. 정영두가 첫 창극 연출을 맡아 성공적인 무대를 완성했다. 오는 30일까지 공연.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