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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립 잡기노트]애국가, 안창호 작사 아니다…최초발굴

등록 2013.08.15 06:21:00수정 2016.12.28 07:5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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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371>  안창호는 여전히 암울하기만 하던 시절에 세상을 떠났고, 윤치호는 조국이 빛을 되찾은 넉 달 뒤 사망했다. 오늘은 제68주년 광복절이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371>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1878~1938)가 아니라는 기록이 발견됐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서지학자)가 찾아낸 종교전문지 ‘신앙생활’ 제126호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규명작업을 벌이던 1955년 4월에 나온 것이다.

 이 잡지에 ‘애국가의 작사자는 누구인가?’라는 글을 쓴 이는 ‘파수군(把守軍)’, 목사 김인서(1894~1964)의 필명이다. 김인서는 목사 채필근(1885~1973)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애국가 가사는 윤치호(1865~1945) 작이라고 확언했다.

 채필근은 김인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25세 때 대성학교서 수학을 가르쳤지요. 그때 내가 도산(島山 안창호, 당시 교장) 선생에게 ‘애국가는 본교 명예교장 윤치호 선생이 작사했습니다’란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내가 ‘황실가’와 ‘태극가’등 옛 노래들을 평양에서 해방 후까지 보존했는데 황실가와 애국가는 전혀 다릅니다. 내 기억력에 이상이 없다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씨입니다.”

 (1955년 7월 연합신문도 ‘애국가 작사자 판정의 시비, 사실을 감정으로 좌우?’와 ‘사적 사실은 그대로’라는 제하로 채필근의 발언을 보도했다.- 6월22일 [신동립 잡기노트]우리 정부, 무서운가? 애국가 작사자 공개)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371>  안창호는 여전히 암울하기만 하던 시절에 세상을 떠났고, 윤치호는 조국이 빛을 되찾은 넉 달 뒤 사망했다. 오늘은 제68주년 광복절이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

 김인서는 “나는 4년 전부터 애국가 작자를 조사했으나 ‘도산 창작’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점에서 오해가 두려워서 발표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학계로부터 ‘귀국 애국가의 작자가 누구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고 있으므로 나의 연구 일단(一端)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또 도산의 제자 강제환 저 ‘안창호 웅변전집’ 143쪽도 인용했다. “애국가를 안 선생님께서 창작했습니까?고 앙문(仰問)함에 대해 선생은 아무 대답도 아니하셨다. 아마도 겸손의 뜻이라고 생각된다.”

 김인서의 판단은 다르다. “만일 안 선생이 창작했다면 직언했을 것이다. 성일관(誠一貫)의 안 선생이 역사의 대(大) 문자(文字)에 대해 겸양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면서 “그러면 왜 원작자를 밝히지 아니했을까?”라고 자문했다. 이어 자답했다.

 “일제 압박 하에서 윤 선생을 애국가 작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신변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위력 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국가 작자를 밝히면 애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윤씨 작이란 기록을 볼 때 절의감(節義感)에 상처를 받았으나 역사는 고칠 수 없다. 애국가 작사자는 불행실절(不幸失節)했으나 국존(國尊) 도산 선생의 품에서 기르고 도산 선생의 목소리로 전해 애국가로의 대의명분을 잃지 아니했다.”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371>  안창호는 여전히 암울하기만 하던 시절에 세상을 떠났고, 윤치호는 조국이 빛을 되찾은 넉 달 뒤 사망했다. 오늘은 제68주년 광복절이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

 김인서도 처음에는 안창호이려니 했다. “나는 16세 때 애국가를 평양 출신 교사에게 전문(傳聞)했으므로 안창호 선생의 작사로 알아왔다. 그런데 1951년 부산 피란 중 ‘이승만 박사’라는 서정주씨 저 전기에서 애국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봤다. ‘1898년 지금 57년 전에 서재필 박사를 중심한 독립협회가 조직됐고 얼마 후에 애국가이자 독립협회가를 윤치호씨가 지어 불렀다 했고, 이 박사는 7년간 옥중고생을 마치고 1904년 지금 51년 전 30세 때에 미국에 건너갔는데 재미동포 환영회 석상에서 밤새도록 동해물과 백두산을 고창(高唱)했다’고 기록돼있다.” 진실 또는 상식의 반전이다.

 김연갑 상임이사는 “이럼에도 흥사단은 작년부터 창립 100년을 기념한다며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라고 주장해 논쟁을 일으켰다. 흥사단은 1947년 이광수 저 ‘도산 안창호’ 이후 확대 재생산되고 학습된 일부의 증언을 들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해오고 있다”며 “채필근의 증언에 관해 흥사단은 이제 명확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진영논리로 비겁하게 뒤에 서 있기만 한 학자와 지식인들도 반성해야 한다”고 짚었다.

 안창호는 여전히 암울하기만 하던 시절에 세상을 떠났고, 윤치호는 조국이 빛을 되찾은 넉 달 뒤 사망했다. 오늘은 제68주년 광복절이다.

 문화부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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