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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재의 크로스로드]대통령의 결례(缺禮)

등록 2015.05.28 14:13:00수정 2016.12.28 1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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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재 사진

교체 대상 장관들의 면직 발표 배려와 예의 무시한 하책(下策) 인재를 내쫓는 '화이트홀'보다 '블랙홀'로 바뀌어야 성공 거둬

 【서울=뉴시스】정문재 부국장 겸 경제부장 =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당연하다. 유전자를 물려받고, 세계관도 받아들인다. 그래서 삶의 궤적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부모가 큰 족적을 남겼다면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자식은 부모의 삶을 적극적으로 모방한다.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부자도 그랬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똑같다. 구별하기 위해 아버지는 '노(老) 피트', 아들은 '소(少) 피트'라고 부른다. 둘 다 총리로서 영국의 도약을 이끌었다.

 노(老) 피트는 애국심 덩어리였다. 영국의 경제적·군사적 우위가 삶의 목표였다. 그는 부정부패에 대해 적대감을 표시했다. 청렴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연설 실력도 뛰어났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모았다.

 소(少) 피트는 준비된 총리였다.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정치철학, 수학, 역사, 화학을 두루 공부하며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자질을 닦았다. 

 피트는 1781년 22세의 나이로 보궐선거를 통해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 허용, 의회 및 선거 개혁 주장 등으로 눈길을 끌었다.

 영국은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피트는 미국 독립을 계기로 영국이 국가전략을 새로이 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자신의 뜻을 펼칠 때가 왔다. 국왕 조지3세는 1784년 피트를 총리로 지명했다. 그 당시 나이가 24세로 역대 최연소 총리였다. 일부에서는 "국왕이 어린 학생에게 영국의 운명을 맡겼다"는 풍자도 나왔다.

 역풍이 피트의 정치 생명을 위협했다. 야당은 불신임 결의를 통과시켰다. 사퇴하는 게 관례였다. 피트는 관례를 거부했다. 오히려 발 빠르게 역공에 착수했다.

 국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상원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국민들도 피트의 편이었다. 국민들의 청원이 이어지자 불신임에 찬성했던 하원의원들이 하나 둘씩 입장을 철회했다. 피트는 그 후 17년 동안 총리로서 영국을 이끌었다.

 국민들은 그의 개혁적 이미지를 높이 평가했다. 피트를 '정직한 빌리(Billy - William의 애칭)'라고 불렀다. 그는 잘못된 제도를 과감히 뜯어고쳤다. 선거구 개혁이 대표적이다. 일부 지역은 산업혁명으로 인구가 크게 줄었는데도 의석 수는 그대로였다. 이런 선거구를 36개나 정리했다.

 피트는 국가재정의 안정을 중시했다. 총리로 취임했을 때 영국의 국가부채는 2억4300만 파운드에 달했다.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전쟁 때문이었다. 매년 이자 지급 규모만 2400만 파운드로 한 해 예산의 1/3 수준이었다. 피트는 증세를 통해 9년 만에 부채를 1억7000만 파운드로 줄였다. 

 피트는 개혁 정책을 통해 영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영국인들은 그를 역대 최고의 총리로 평가한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자식도 없었다. 1806년 세상을 떠나면서 4만 파운드의 빚을 남겼다. 하원은 특별 결의를 통해 피트의 빚을 대신 갚아줬다.

 피트도 단점이 많았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만 가까이 했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어울리지도 않았다. 자주 우월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장점이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청렴했고, 리더십도 뛰어났다. 그는 팀워크를 중시했다. 총리는 각료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조정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장관들을 최대한 배려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적(政敵)에게는 가혹한 반면 참모들에게는 따뜻했다. 물러나는 장관들에게도 깊은 애정을 표시했다.

 다음은 송석민 전 한국투자신탁 부사장의 전언(傳言)이다. 그는 청와대에서 비서로서 박정희 대통령을 모셨다.

 "장관이 물러나면 박 대통령은 전별금과 함께 친필 편지를 보냈다. 비서로서 그 편지를 전달할 때가 많았다. 재직중의 노고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양복 3~4벌을 사 입을 수 있을 정도의 금액에 불과했다. 장관들은 돈보다는 편지 내용에 감동했다."

 청와대가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면직을 공표했다. 이미 교체를 결정한 만큼 조용히 이임식을 치르게 하는 게 예의였다. 마치 등 뒤에 침을 뱉은 꼴이다.

 장관은 우수한 인재다. 인재를 그렇게 대우해선 곤란하다. 우선 장관을 비롯한 관료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새로운 인재를 모시기도 힘들어진다. 청와대는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black hole)'이라야 한다. '화이트홀(white hole)'로 전락하면 나라가 흔들린다.



 PS 다음은 남덕우 전 총리가 무역협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남 회장을 보좌했던 전직 무역협회 임원의 전언입니다.

“남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편지를 마치 사진을 앨범에 담아 보관하듯 소중히 간직했다. 편지는 작은 공책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박 대통령이 그만큼 자주 친필 편지를 보냈다는 얘기다. 노고를 치하하거나 가족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 많았다. 이사가려고 집을 짓고 있다는데 공사는 잘 되어가는지를 묻기도 했다. 편지를 통해 '당신을 잊지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인상을 줬다. 특정 업무를 지시하는 내용도 눈에 띄었다. 글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글씨체가 참 아름다웠다.”

참고문헌 1) Adams, Charles. 2001. For Good and Evil : The Impact of Taxes on the Course of Civilization. Maryland. Madison Books. 2) 케네스 모건 엮음. 영국사학회 옮김. 1997. 옥스퍼드영국사. 한울아카데미. 3) William Pitt, 1st Earl of Chatham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4) William Pitt the Younger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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