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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이문열, 뒤틀린 '촛불 혐오증'의 내력

등록 2016.12.04 17:54:02수정 2017.06.08 14: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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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 사회부장

김호경 사회부장

【서울=뉴시스】김호경 사회부장 = "소설가 이문열씨는 19일 밤 개표방송을 보다가 술을 마시고 대취했다. '선동성에 노출된 젊은이가 다수가 되었다. 빨간 옷을 입고 다수의 힘으로 광장을 점거하는 젊은이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20일 아침까지 그는 술이 덜 깨어 있었다."

지난 2002년 12월 21일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기사의 한 대목이다. 소설가 김훈이 기자 시절 쓴 '노무현 시대 개막-고뇌에 찬 50대'라는 제목의 기획물이었다. '다수의 힘'이나 '광장'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선동'과 결부시키는 이문열의 멘탈리티가 그대로 엿보인다. 취중인 탓에 노출된 은밀한 의식구조는 아닐 것이다. 2008년 6월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촉발돼 한 시대의 키워드로 등장했던 촛불집회 때는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발언했었다.

"위대한 디지털 포퓰리즘의 승리다. 그러나 본질은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이다." "불장난을 오래 하다 보면 결국 불에 데게 된다. 너무 촛불 장난을 오래 하는 것 같다." "이제 100일 된 대통령을 나가라고 한다거나 이런 식의, (촛불시위는) 국헌문란 행위이고 내란에 준하는 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문열의 '광장 공포증', '촛불 혐오증'은 이처럼 오랜 내력을 가졌으며 그만큼 뿌리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또 한 번의 대규모 촛불집회를 앞둔 3일 오전부터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이문열'이라는 이름이 상위에 걸려있길래 무슨 일인가 살펴봤더니 이 소설가가 오랜만에 다시 필화(筆禍)를 일으킨 탓이었다.

직업상 매일 중앙일간지 대부분을 흝어보기 때문에 전날 조선일보 1면에 이문열의 글이 실린 건 알고 있었으나, 며칠째 계속된 '위기의 대한민국…보수의 길을 묻다'라는 묵직한 타이틀의 릴레이 기고문 중 하나였던 탓에 '보수여 죽어라, 죽기 전에…새롭게 태어나 힘들여 자라길'이라는 엄숙한 제목만 보고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고 말았다. 뒤늦게 기고문을 정독하고 보니 그가 또 '시대와의 불화'를 일으킨 사정이 쉽게 이해된다. 이문열은 해당 글에서 크게 두 대상, 즉 언론과 촛불집회 참여자들에 대한 감정을 기이할 정도로 뒤틀린 심사로 여과 없이 쏟아냈다.

"매스컴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악머구리 들끓듯 하고" "무엇에 홀린 듯 여성 대통령의 미용이나 섭생까지 깐죽거리며 모욕과 비하를 일삼다가 그것도 특종이랍시고 삼류 도색 잡지도 다루기 낯간지러운 사생활에 대한 억측과 풍문을 무슨 큰 폭로라도 되는 것처럼 뉴스로 쏟아내는 매스컴" "대통령 여당 몰매 놓기로 의식 수준의 고하를 겨루거나, 대통령 속곳까지도 슬쩍슬쩍 곁눈질하며 최가네 일족 잡상스러움을 시시덕거리거나, 문고리 몇 인방이니 친박 개박 매화타령 하며 킬킬거리는 모습" "지난 몇 달 매스컴의 모진 찧고 까불기"

한때 현학적이나마 고아하고 유장한 문체를 자랑했던 국민 작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깐죽거리며 모욕과 비하를 일삼은' 첫 번째 타깃은 언론이다. 그런 '매스컴의 호들갑'으로 '국민의 뜻'이 되었다는 촛불 민심에 대해서는 또 다음과 같이 폄훼한다.

"이제는 매스컴이 스스럼없이 '국민의 뜻'과 혼용하는 광장의 백만 촛불도 마찬가지다." "100만이 나왔다고, 4500만 중에 3%가 한군데 모여 있다고, 추운 겨울밤에 밤새 몰려다녔다고 바로 탄핵이나 하야가 '국민의 뜻'이라고 대치할 수 있는가." "심하게는 그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와 일사불란한 통제 상태에서 '아리랑 축전'에서와 같은 거대한 집단 체조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더라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지난 주말 시위 마지막 순간의, 기계로 조작해도 어려울 만큼 정연한 촛불 끄기 장면과 그것을 시간 맞춰 잡은 화면에서는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고도 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한 소설가가 개인적 이념성향과 당파성을 발현하는 그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표현의 방식과 논리다. 최순실 게이트에 관한 언론의 숱한 보도 중에는 일부 선정적이거나 사실관계가 불충분한 의혹 기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보수-중도-진보 매체가 총망라돼 종전까지 살기등등했던 권력을 상대로 내놓은 주요 추적 보도가 대부분 사실이거나,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점은 최순실, 안종범, 정호성, 차은택, 김종, 송성각, 장시호 등 핵심 연루자들을 검찰과 법원이 모조리 구속시켰다는 점에서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정권의 시녀'라고까지 지칭되던 검찰총장이 자신의 임명권자인 박근혜 대통령을 성역 없이 수사토록 지시해 검찰이 조직의 사활을 걸고 작성한 공소장 역시 (최순실의 태블릿PC는 차치하고라도) 박 대통령의 발언과 일정 등이 소상히 담긴 안종범의 다이어리, 정호성의 휴대전화 내역 등을 중심으로 그 외 연루자들의 진술과 증거자료가 뒷받침돼 나온 것이다. 이 또한 그간 언론의 보도 내용과 대개 부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악머구리 들끓듯' 한다거나 '시시덕' '킬킬' 등의 저급한 묘사를 서슴지 않으며 급기야 '호들갑' '찧고 까불기'라는, 언론에 대한 총체적 매도를 서슴지 않는 이문열의 표현방식과 의식구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의 비열한 수사(修辭)에 대해서는 '찧고 까불기'라는 본인의 표현을 그대로 돌려주면 되겠지만, 그 가공할만한 비논리·무논리에 대해서는 중고생용 논술책이라도 사서 보내줘야 하는지 암담한 노릇이다.

4500만 중에 100만이 나왔다고 탄핵이나 하야가 '국민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뚱딴지같은 소리도 마찬가지다. 역대 대통령 최저치를 경신한 5% 이하의 지지율이나, 탄핵과 하야를 포함해 대통령이 퇴진해야 한다는 국민이 80~90%대에 달한다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 '임기를 끝까지 마쳐야 한다'는 응답이 2.2%에 불과했다는 조사 내용 등은 이문열의 눈과 귀에 도무지 '국민의 뜻'으로 와 닿지가 않는 모양이다. 이문열을 만족시키려면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시민들이 휴일에 전국 각지에서 거리로 몸소 나와야 할까. 1000만? 2000만? 못해도 절반을 웃돌아야 '국민의 뜻'이라고 마지못해 인정할 테니 3000만 정도?

'기계로 조작해도 어려울 만큼 정연한 촛불 끄기 장면과 그것을 시간 맞춰 잡은 화면에서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한 대목에서는 이문열이 요즘 말로 '4차원과(科)'가 아닌가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밀집한 군중이 사회자의 신호에 맞춰 간단한 동작으로 '1분 소등'을 하고, 현장에서 업무 중인 언론이 그것을 카메라로 잡았다고 해서 대관절 뭐가 '기계로 조작해도 어렵다'느니 '으스스'하다느니 난데없는 과장으로 야단을 떠는 것일까. 압권은 평화롭고 질서정연한 촛불집회를 북한의 '아리랑 축전'에 비유한 서술이다. 친북, 종북 이미지를 끌어들이려는 그 저열하고 얼토당토않은 비약과 논리 붕괴에 대해서는 딱히 반박을 할 의욕이나 가치마저 못 느낀다.

'~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 '~하다는 이들도 있었다', '~하더라는 사람도 있었다', '~한 느낌마저 들었다고도 했다'와 같이 실명이나 증거를 밝히지 않는 애매한 서술 방식은 이문열이 오래전부터 자주 써먹어온 교묘한 간접화법인데, 누군가 정색을 하고 따질 때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거나 객관성을 가장하려는 수법일 뿐 실상 이문열 자신의 의견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이문열의 글에는 학생들이 보고 배우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흑백사고의 오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무차별적 적용의 오류'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 '강조의 오류' '확증 편향' '비방적 명명' 등등 온갖 논리적 오류들이 뒤범벅돼있다.

이번 이문열의 조선일보 기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실망했다' '나이 들더니 이상해졌다'는 반응을 관련 기사들의 댓글이나 SNS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데, 소싯적에 그가 출간한 모든 장편소설은 물론 시시콜콜한 단편들까지 샅샅이 다 찾아 재독, 삼독했던 필자로서도 착잡한 회한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번과 유사한 논법의 '이문열표 칼럼'은 유구한 이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가령 2000년 2월 중앙일보에 기고한 '홍위병을 돌아보며'라는 시론(時論)은 "끊임없이 나도는 음모설(陰謀說)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정부나 여당이 총선연대의 조직과 활동에 개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뿐더러 시민단체의 선의(善意)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그런데도 총선연대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면 자꾸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기기묘묘한 논리 전개로 파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당시 무명에 가깝던 진중권은 '자유기고가'라는 신분으로 같은 지면에 '이문열과 젖소부인의 관계?'라는 번뜩이는 기고문을 올려 빨간펜 선생님이 밑줄 긋듯이 이문열의 부당 논증을 낱낱이 해부했었다. 그 글로 주목받게 된 것이 그가 일약 논객으로 급부상한 결정적 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문열의 논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는 진중권의 반박 시론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읽어보면 초등학생이라도 곧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문열은 그 뒤에도 논술 실력이 별반 나아지는 기색이 없었다.

2001년 7월 조선일보에 기고한 시론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에서는 "국세청이 언론기업의 탈세 혐의를 검찰에 고발하는 것을 3개뿐인 방송사가 모두 생중계하고 종일 그 뉴스로 화면을 뒤덮는 걸 보면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의 대국민 선전 선동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해 3대 지상파 방송사 종사자들의 공분을 샀다. 당시는 사상 초유의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 정치권은 물론 일반인들도 지대한 관심을 쏟던 시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별개이자 경쟁 관계인 방송사들이 낮시간에 각자 뉴스 중계를 한 것을 두고 '종일 화면을 뒤덮었다'고 과장하며 심지어 반인륜적 학살의 대명사인 나치 행태에 비유했으니 소란이 없을 수 없었다.

같은 시기 동아일보에 기고한 시론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 또한 이문열이 평소 즐기는 표현대로 '악머구리 들끓듯 한' 반응을 일으켰는데, 주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요즘의 이런저런 시민운동에서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자주 그들의 견해가 정부 혹은 정권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서 정부가 이미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따로 시민운동으로 옥상옥(屋上屋)을 세울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태연스레 정부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운동을 보게 되면 절로 어떤 이면적인 연계를 억측하게 된다. 일반의 그런 예측에서 나온 의구와 경계가 어쩔 수 없이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보게 한다."

과장법이 문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수사법이겠지만 이런 시사 칼럼에서는 사실과 논리에 충실해야 하고 과장은 극히 절제됨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문열은 글을 불쏘시개 삼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논쟁의 불을 댕겨보자고 작정한 듯이 '홍위병' '나치' 등 극단적인 비유를 상투적으로 남발했다. 가히 '은유의 폭력'이라고 할 만 하다. 그러니 이번 '북한 아리랑 축전' 비유도 사실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우연치고는 너무 자주 이문열의 견해가 정부 혹은 정권의 그것과 일치해 홍위병을 떠올리게 된다. 태연스레 정부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이문열을 보게 되면 절로 어떤 이면적인 연계를 억측하게 된다"라고 간단히 반격할 수 있는 이런 기본적인 논리적 오류와 비약이 이문열의 글에서는 너무 자주 출몰해왔다. 실컷 본인의 '억측'을 표명한 뒤에 '일반의 예측'이라고 핑계 대는 것 또한 앞에서 거론했던 이 소설가 특유의 레토릭이다.

위에 열거한 이문열의 글들을 읽다 보면 결국 잘못된 근거들의 연쇄 결합이 낳을 수밖에 없는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를 떠올리게 된다. 미끄럼틀을 한번 타기 시작하면 끝까지 미끄러져 내려가게 된다는 것인데, '도미노의 오류'와 같은 뜻이다. 허구적 전제를 토대로 비약이 비약을 낳는 가정법의 총체적 난맥상이다. 그의 시사적 글이 늘 도착하는 종착역이다.

이문열이 정말 논리와는 담쌓은 소설가이기 때문에 이런 독설과 언어폭력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일까. 어떤 문학평론가는 "정확하고 논리적인 글을 쓰는 능력과 비유적이고 창작적인 글을 쓰는 능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이문열은 적어도 저널리즘 영역에서 사회과학적 글을 써서는 안 되는 작가인 것 같다.

이문열이 한국의 대표적 '문화권력'으로 오랜 시간 군림하면서 심심치 않게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여온 점에 비춰볼 때 그가 일종의 프로파간다 차원에서 자신의 보수적, 아니 수구적 세계관을 대중에 주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짜 논리'를 구사하는지도 모른다. "대중의 관행과 의견을 지성을 발휘해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단언했던 '프로파간다'의 효시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신념처럼 말이다.

이문열이 자기 소설에서 "시뻘건 의도를 감추고 있는 주사파 수령론의 무리들" "새로 주군이 된 정권을 위해 파렴치하게 짖어대는 것을 진보로 아는 친여 매체" 등으로 반대세력을 적나라하게 비하하고, 심지어 자신과 '곡학아세' 논쟁을 벌였던 당시 추미애 의원(현 더불어민주당 대표)을 '키워도 너무 잘못 키운 개'라고 묘사했던 사실도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공격할 때 북한을 들먹이는 버릇에 대해서는 예전에 정신과 의사 정혜신이 내놓은 분석이 참고가 된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을 월북자의 아들 즉 빨갱이로 보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 월북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들어차 있을 것이다. 그의 무의식은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말을 피하기 위한 긴장과 불안으로 점철된 것이리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무조건 찬성하고 그에 발맞추어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곧 70을 바라보는 노작가가 아마도 심혈을 기울여 썼을 '위기의 대한민국…보수의 길을 묻다'라는 엄중한 주제의 기고문에서 예전에 비해 한치도 나아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악화된 개인적 아집과 오만을 목도하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일세를 풍미했던 대작가가 헌정 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집회에 대해서도 '4500만 중 3%' '아리랑 축전' 운운하는 졸렬한 발상 밖에 못 하고, 그토록 화석화한 두뇌로 중앙일간지 1면을 빌어 국민 다수와 언론계 종사자들을 조롱하는 사태는 비극에 가깝다. 그 어떤 확신과 강박이 이런 무모함을 부르는지 아연할 따름이다.

그는 시종 '진정한 보수의 가치와 이상'을 역설했지만, 그 조악하고 반(反)지성적인 언설은 지도층의 규범과 공동체의 통합을 중시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모습이 아니다.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수구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관점을 내면화한 지독한 권위주의자의 습속만 느끼게 할 뿐이다. 이문열이 과거 똑같은 일간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음을 언론과 촛불 시민들은 물론 그 자신이라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굳이 두 기관차(정권과 언론)가 충돌로 승패를 가름해야 한다면 나는 언론 쪽의 승리를 기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권은 한 시대의 정치제도가 빚어낸 가변적 현상이지만 언론은 제도 그 자체로서 영구적이기 때문이다. 언론이 없고 정부만 있는 사회보다는 정부가 없고 언론만 있는 사회를 선택하겠다는 말은 바로 이 뜻이 아니었던가." (조선일보 2001년 7월 2일자 시론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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