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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내가 이러려고 기자를 했나'…집회 취재 수난기

등록 2017.01.12 11: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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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 기자수첩용 사진**

【서울=뉴시스】이재은 기자 = "아저씨!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어딜 만지냐구요?" "아니…난 그냥…."

 지난 9일 오후 2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표결을 한 시간 앞둔 국회 앞은 긴장감으로 가득찼다. 박 대통령의 즉각 퇴진과 탄핵안 가결 촉구를 외치는 시민 수만여명과 이를 통제하려는 경찰들로 국회 앞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사건팀 소속인 기자는 그날 수많은 인파 속에서 '엉만튀(엉덩이 만지고 도망가기)'를 당했다.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이면 꼴불견이 꼭 있듯 폭풍전야 같은 그 순간에도 이상한 사람은 어김없이 존재했다.

 "질서를 지켜 달라"는 경찰과, "경찰은 평화시위를 보장하라"고 거세게 맞서는 시민들 사이에서 충돌이 생길까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뒤에서 낯선 이의 손길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파란색 등산복 차림, 검정색 뿔테 안경, 마르고 왜소한 체구, 평범한 인상,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당황하며 손을 얼른 거두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기자가 언성을 높이며 따지자 그는 씩 웃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주변에 수많은 경찰이 있었으나 급히 집회 스케치 기사를 써야 하는 상황인지라 별다른 조치를 취할 겨를이 없었다. 그를 그대로 놓친 일은 두고두고 후회로 남을 것 같다.

 기자의 수난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탄핵안이 가결된 다음날인 10일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열린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등 보수단체의 집회 현장에 나갔다.

 영하권의 매서운 날씨에도 수많은 어르신들이 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누명 탄핵 원천 무효"를 외쳤다. 귀가 터질 것처럼 시끄러웠으나 단상 앞에 자리 잡아 연설자의 발언을 녹음하면서 메모했다. 추운 날씨에 공감도 잘 되지 않는 발언을 몇 시간 째 듣고 있으려니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취재 일념 하에 버티고 서있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누군가가 기자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별이 보일 정도로 아찔했다. 당황해서 뒤돌아보니 왜소한 체구의 할머니가 "너는 뭔데 태극기도 흔들지 않고, 휴대폰으로 녹음이나 하고 있냐. 첩자는 썩 꺼지라"며 기자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기자라 취재를 하고 있다고 차근차근 설명했으나 할머니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오히려 "기자든 뭐든 태극기를 잡지 않고 구호도 외치지 않을 거면 꺼지라"며 계속해서 기자의 머리와 등을 때렸다.

 그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최순실 사태가 터진 이후 주말도 없이 일하면서 피곤에 절어있는 것도 서러운데 별별 일을 다 겪고 있으니 '내가 이러려고 기자를 했나'싶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할머니의 폭언과 폭행이 그치질 않자 주변 다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방패막이 되어주셨다. "그만하라"고 언성을 높이며 자리를 바꿔주겠다는 인상 좋은 할머니도 나타났다. 그럼에도 처음 그 할머니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화를 냈다.

 그러던 중 단상 위에서 촬영을 하고 있던 타 언론사 사진기자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단상을 가로 질러서 이곳을 빠져나가라며 손을 붙잡고 기자를 단상 위로 올려준 것이다. 그날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진기자였으나 동료애가 살아있다는 것에 무한 감동을 느꼈다.

 이틀 연속 끼니도 거르고 추위에 떨며 성추행에 폭언, 폭행까지 겪고 나니 심신이 지쳤다. 그러나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에 국회 앞이 떠나갈 정도로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 청와대 인근 밤하늘을 수놓으며 현란하게 터지는 폭죽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내가 이러려고 기자를 했구나' 싶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 어린 딸에게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이라며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아버지, 지팡이를 짚으며 행진하는 백발의 할머니 등 거리를 누비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추위와 어둠도 막지 못했다.

 아직 끝이 아니다. 남은 숙제가 많다. 국정 역사교과서, 세월호 진실 규명, 위안부 한일 합의 등 많은 문제들이 남아있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역사의 현장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국민들 모습을 기사에 하나하나 담아 더 나은 사회가 되는 과정에 보탬이 되고 싶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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