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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학, 비우고 채웠다…푸르메재단 기적의 주역

등록 2017.01.17 17: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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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서울=뉴시스】신동립 기자 = 평일에는 경복궁과 청와대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 주말이면 촛불집회로 붐비는 곳이 서울 청운동과 효자동 일대 서촌이다. 청와대 입구 효자동 네거리에 있는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로 회색 현무암과 유리로 지은 현대식 건물이 2012년 들어섰다.

 ‘푸르메 재활센터’다. 입구로 들어서면 청동으로 된 기부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5년 전 완공 당시 기부자들을 기억하려고 마련한 공간이다.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설마가 사람잡듯 이 빌딩을 세운 이가 푸르메재단 백경학(54) 상임이사다. 1층 장애인 전용 푸르메치과, 2층 장애어린이를 위한 푸르메재활의원, 3층 종로장애인복지관을 지나면 4층에 사무실이 있다.

 푸르메재활의원에서 치료받는 어린이는 몇 명이나 될까. “이곳은 장애어린이를 치료하는 외래의원이다. 장애는 크게 신체장애와 정신장애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는 주로 신체장애어린이들이 물리치료와 작업치료, 감각통합치료를 비롯해 언어, 음악, 미술, 인지, 시지각 치료를 받고 있다. 한쪽에서는 초등학교 어린이 중 자폐와 발달장애를 가진 꼬마들이 방과 후에 집중치료를 받는다. 푸르메치과에서는 하루 20명 내외의 장애인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

 시민기금으로 탄생한 병원건물이다. “후원자 3000명에게서 기금 85억원을 모아서 지었다. 인근 청운초등학교 어린이부터 출간한 책의 첫 인세를 기부해준 소설가 고 박완서 선생, 정호승 시인, 청렴판사로 유명한 조무제 대법관, 가수 션 등 정말 많은 분들이, 3000명 이상이 기부해줬다. 시민의 힘으로 어린이재활치료센터를 건립하겠다는 푸르메재단을 믿은 그분들 덕분에 이렇게 좋은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지난해 상암동에 큰 어린이재활병원도 열었다. “하루 100명이 입원할 수 있고 500명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오픈했다. 이곳에서 재활센터를 운영하다 보니 아이들이 나아지는 것이 보였다. 집중적으로 치료할 수 있으면 학교도 갈 수 있고, 나중에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인데 하루 2~3시간만 치료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아이들을 집중치료할 수 있는 병원 건립을 꿈꾸게 됐고 2005년 재단이 세워진 지 11년 만에 그 꿈을 이루게 됐다.” 

 재활치료가 필요한 어린이가 얼마나 되나. “등록된 장애어린이청소년은 9만명 정도다. 다른 형제에게 불이익이 될까봐 부모가 감추거나 아이가 어리기 때문에 나을 수 있다고 믿어서 등록을 꺼리기도 한다. 진단을 기다리는 경우까지 감안하면 약 3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10만명은 정기 혹은 비정기적으로 치료와 검진이 필요한 어린이들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어린이재활병원이 없었다니 뜻밖이다. “놀랍게도 사실이다. 일본 202개, 독일 140개, 미국 40개가 되는 어린이재활병원이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일본 오사카시만 하더라도 성인과 어린이를 함께 치료하는 재활병원과 어린이재활병원이 25개나 된다. 우리나라에는 그동안 어린이재활병원이 두 곳 있었지만 경영난으로 문을 닫거나 의원으로 축소됐다. 모두 재정 때문이다. 어린이재활치료는 의료보험수가가 낮아서 치료하면 할수록 적자가 되는 구조다. 병원이 수익을 낼 수 있었다면 아마 수 십 개의 어린이재활병원이 생겼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부 지원을 받는 서울대병원이나 대기업이 지원하는 삼성병원에서조차 어린이재활병원은 물론 성인재활병원조차 운영하지 않고 있다.”

 네 평 남짓한 백 상임이사의 사무실에는 ‘온라인 분석’, ‘모금 사례’, ‘병원기금 캠페인’이라고 적힌 파일 박스 50여개가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책장 뒤로 창을 통해 북악산이 보인다.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이 공간에서만큼은 뿌옇게 아지랑이 같은 봄기운이 느껴진다.

 병원 문은 열었지만 운영에 어려움은 없을까. “예상한대로 매달 3억원의 적자가 나고 있다. 지난해 3월 문을 연 뒤 12월 말까지 모두 30억원의 적자가 났다. 하지만 11월부터 입원환자가 늘고 치료횟수가 많아지면서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병원건립을 준비하면서 초기운영비를 막을 수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지역의료재활시설 지원비로 서울시로부터 10억원을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지난해에 비해 좋은 상황이다.”

 공공의료사업인 어린이재활전문병원 건립은 중앙정부의 몫이다. 보건복지부의 도움은 없나. “보건복지부에 몇 차례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 지원을 요청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답이 없다. 일본과 미국, 유럽에서는 중앙정부와 지자체, 보험회사가 재활병원을 직접 운영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민간병원을 지원한 전례와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서울시가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을 서울시의 안정망병원으로 지정해 MOU를 체결하고 지원하듯 보건복지부도 법적인 선례를 만들어 지원한 뒤 투명하게 운영하는 지 감시하고 문제가 있으면 지원금을 회수하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가난한 어린이들은 치료를 포기하고 부자 아이들은 외국으로 나가서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다.”

 병원을 안정화할 수 있는 장기적인 대안은 있을까. “어린이 재활치료의 중요성에 공감해 정기후원하고 있는 기부자가 5000명 정도 된다. 이 수를 배인 1만명으로 늘리고, 중증장애인에 대한 정부의 의료수가를 현재보다 인상하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한다. 대통령선거를 맞아 후보들도 장애어린이재활치료에 명확인 입장과 공약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뉴시스】푸르메 재활센터 

 푸르메재활센터 1층에 치과가 있더라. “보통 치과는 3, 4층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증장애인이 출입하기 힘들뿐더러 어렵게 찾는다 해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장애인이 저렴한 비용에 쉽게 치료받을 수 있는 치과를 열게 됐고 이 건물이 지어지면서 1층에 자리 잡게 된 거다.”

 푸르메재단에서 가장 먼저 개설한 의료기관이 장애인전용치과다. 백 상임이사가 2006년 장애인 행사에 갔다가 “이가 아파요. 음식을 먹고 싶어요”라고 하소연하는 장애인을 만난 것이 계기다. 이튿날 백 상임이사는 광화문~종로3가 치과 30여 군데를 찾아다니며, 아내가 중증장애인인데 진료받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의료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장애인을 진료하면 다른 환자가 싫어한다는 이유에서다. 서울대 치과교수로 있던 친구 장경수 원장과 상의, 자원봉사의사로 운영되는 푸르메치과를 연 것이 푸르메재단 의료기관의 모태가 됐다.

 백 상임이사는 기자였다. 왜 푸르메재단 일로 돌아섰나. “CBS와 한겨레신문, 동아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1996년 언론관련 재단의 지원으로 2년간 독일 뮌헨대학으로 연수를 갔다. 아내는 서울시 공무원이었다. 독일 통일문제에 대한 논문을 쓴 뒤 귀국하기에 앞서 영국 스코틀랜드로 자동차여행을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나도 다쳤지만 아내는 달려온 차가 덮쳐서 100일 혼수상태와 세 번에 걸친 큰 수술을 받고 결국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 비행기로 독일로 이송돼 1년반 동안 재활치료를 받고 귀국하게 됐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중도장애인을 치료하는 재활병원이 없었을뿐 아니라 너무 열악했다. 우리가 영국과 독일에서 직접 환자로서 경험했으니 정말 환자를 위하는, 환자가 중심이 되는 병원을 하나 지어보자고 결심해서 시작한 것이다.” 

 재단이라면 재산이 주인이다. 기본재산은 어디에서 왔나. “동아일보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데 ‘옥토버훼스트’라는 소규모 맥주회사를 차렸다. 주위사람들이 1인 5000만원씩 59명이 투자해서 법인을 만들었다. 다행히 성장해서 매장이 8개로 늘어났고 내가 가진 10%의 지분과 아내가 8년 동안 가해자측 보험회사와 소송을 벌여 받은 10억600만원의 피해보상금을 내놓아 푸르메재단이 세워지게 됐다.” 

 푸르메재단 초기에 무엇이 가장 힘들었을까.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재활병원을 짓는데 왜 내가 기부해야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나서야 할 문제라는 거다. 누구나 한 순간에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장애를 치료하는 것은 나와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재활치료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사회 각계를 대표하는 분들이 나서주고 홍보대사인 가수 션씨와 (전신화상을 극복한 작가) 이지선씨가 재활병원의 필요성을 알리면서 후원자들이 늘었다. 그리고 그 결실이 맺어져 이곳 푸르메재활센터와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을 짓게 된 거다.”

 마포 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할 때 땅값까지 500억원 넘게 들었다. 무슨 돈으로…. “되돌아 보면 기적이다. 마포구는 SH공사로부터 1000평이 되는 병원 부지를 100억원에 구입해 우리 재단에 제공했고 서울시와 보건복지부는 병원에 필요한 의료기구와 기자재를 지원했다. 시민 1만명, 기업과 단체 500곳은 430억원을 모아줬다. 말 그대로 시민과 기업, 정부가 함께 일궈낸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제3섹터 방식의 시민병원이다. 기부자 중 기억에 남는 분들이 많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다가 차가 전복돼 중도장애를 갖게 된 이철재(전 쿼드디멘션스) 사장이 11억원을 쾌척했고 넥슨 김정주 사장이 200억원이라는 큰 기금을 기부해줘 가능했다”.

 시민의 기부로 병원을 지은 사례가 있을까. “스위스 국민 120만명의 후원으로 건립돼 운영되고 있는 ‘노트윌’이라는 척수재활전문병원이 있다. 스위스 국민 7명 중 1명이 민간병원을 후원한다는 것은 세계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기부라기보다는 보험 성격이 짙은 회원제 모금으로 스키를 타거나 운전을 하다 사고를 당하면 의료혜택을 받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은 정말 순수한 기부로 이뤄진 시민의 병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 성숙한 기부문화의 한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기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재단 대표번호로 전화를 하든지 홈페이지로 들어오면 후원할 수 있다. 꼭 경제적인 후원이 아니더라도 자원봉사나 재능기부도 할 수 있다.”

 푸르메재단 대회의실 전면에는 액자가 하나 걸려있다. ‘소중한 만남 푸르메재단, 아름다운 병원 푸르메병원’. 글씨체가 낯익다. 병원을 잘 지어달라는 마음을 담아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선물한 것이다.

 소중한 만남은 이어지고 있다. 아름답게.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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