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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세에 무대의상 도전…진태옥 "메디아, 우리 인생 같아"

등록 2017.02.23 13:5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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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연극 '메디아'에서 의상 제작을 맡은 진태옥 패션디자이너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02.23.  bjko@newsis.com

【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연극 '메디아'에서 의상 제작을 맡은 진태옥 패션디자이너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02.23.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할머니가 이렇게 고와도 되는가 싶다. 패셔니스타 같다. 블랙 터틀넥 니트 위에 화이트 셔츠를 입고 검은색 스니커즈를 신었다. 팔순이 넘었다는 나이는 믿을수 없다. 대화 도중 부끄럽다며 미소를 짓자 여고생같아 보이기도 했다.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83)을 의상실이 아닌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국립극단(예술감독 김윤철) 연극 '메디아'의 무대의상을 맡았다. 패션디자이너로서 인생 처음으로 도전하는 무대 의상이다.

 새로움때문일까. 노익장의 열정을 과시했다. 거듭 "연극 작업이 즐겁다"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당대 3대 비극 작가로 불리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는 주인공 '메디아'가 행복하게 살던 과거의 기억과 자신을 버린 남편 이아손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파국을 맞는 내용이다.

 "원작을 읽어보니까 참 좋았어요. 비극이지만 아름다웠죠. 한 인간의 삶이 우리 인생과 같다는 걸 느꼈어요."  

 대본을 15번 이상 읽었다는 진태옥은 하지만 처음에 참여 여부를 놓고 망설였다. 기독교를 믿는 그녀에게 자신의 아이마저 찌르는 메디아의 이야기가 큰 고민이 됐기 때문이다.

 "7번쯤 읽으니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네 인생이 담겼기 때문에 편협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동정심이 들더라고요."  

【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연극 '메디아'에서 의상 제작을 맡은 진태옥 패션디자이너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02.23.  bjko@newsis.com

【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연극 '메디아'에서 의상 제작을 맡은 진태옥 패션디자이너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02.23.  [email protected]

 메디아가 결국 자신이 낳은 아이들까지 죽인 것은 자식들의 생명만 유지시키는 건 의미가 없어서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완결을 짓고 가겠다는 여성의 강인함, 어머니로서의 강인함이었다"는 것이다.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은 다르겠지만, 맹목적으로 사랑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한 얘기를, 의상으로나마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어요."

 연출을 맡은 로버트 알폴디도 진태옥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지난해 국립극단의 셰익스피어의 작품 '겨울이야기'를 연출한 알폴디는 고전 희곡을 오늘날의 무대에 맞게 탈바꿈시킨다는 평을 받고 있다.

 "컬렉션도 껴 있고 다른 프로젝트도 많아 시간을 쪼갤 수밖에 없는데 연극은 너무하고 싶고, 그래서 망설였는데 감독님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매일 만나지는 못하지만 서로 '필(Feel)'이 통한다는 걸 단숨에 느꼈죠."

 메디아 역의 배우 이혜영과도 이번에 정식으로 처음 만났지만 잘 맞는다고 즐거워했다. "혜영 씨의 비음 소리가 정말 '메디아'와 매치가 잘 돼요. 젊었을 때부터 참 독특하고 매력 있는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사귈수록 솔직한 매력이 있더라고요. 예전에 교회에서 우연히 봐서 성경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연극 참여 결정을 하면서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연극계 대모' 박정자를 비롯해 주변에 연극계 인사가 많은 진태옥은 무대 광으로 소문이 났다. 최근만 해도 박정자와 함께 국립극장 NT라이브의 '제인 에어'를 봤고, 뮤지컬 '팬텀'도 관람했다. "(국립극장 NT라이브의 또 다른 작품인) '프랑켄슈타인은 이미 매진이더라고요. 박정자 선생님에게 왜 빨리 예매하지 않았느냐고 뭐라 그랬어요"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연극 '메디아'에서 의상 제작을 맡은 진태옥 패션디자이너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02.23.  bjko@newsis.com

【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연극 '메디아'에서 의상 제작을 맡은 진태옥 패션디자이너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02.23.  [email protected]

 "박정자 선생님과는 감성이 통해요. 보슬보슬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을 좋아하는데요. 눈이 오면 서로에게 전화를 해서 "왜 눈이 오는데 가만히 있는 거야'라고 말한 뒤 같이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죠. 까르르르."  

 박정자 뿐 아니라 숱한 연극 관계자들의 친분으로 인해 진작 무대의상 작업 제안이 많았을 법도 한데 이제야 참여를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그동안 참여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 제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조심성 때문이었어요. 오히려 친한 무대 사람들과 작업하기가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호호."   

 '한편의 시(詩) 같은' 의상으로 유명한 진태옥은 패션계 한류열풍을 주도한 선구자다. 1993년 세계적 패션 컬렉션인 프랑스 파리의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한국인 최초로 참가했다.

 "1989년 파리에 등단했을 때 '너는 누구니?'라는 질문이 나왔어요. 한국에서는 받아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는데 '너는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라는 물음이었겠죠. 그 질문을 받고 이곳이 갖고 있지 않는 걸 선보이려고 했어요. 신사임당 스토리가 대표적인데 전통 자수를 응용해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남성복 옷감, 진(Jean)하고 매치를 했죠. 달항아리의 미니멀리즘도 선보이고요."  

 1988년 서울올림픽 유니폼, 2003년 아시아나 항공 유니폼도 디자인한 그녀는 우리나라의 전통 소재 위에 전통 무늬와 민화를 손자수하거나 특수 프린팅해, 동서양이 어우러진 단아한 디자인으로 주목받아왔다.

【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연극 '메디아'에서 의상 제작을 맡은 진태옥 패션디자이너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02.23.  bjko@newsis.com

【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연극 '메디아'에서 의상 제작을 맡은 진태옥 패션디자이너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7.02.23.  [email protected]

 영국 파이돈사 선정 '20세기를 빛낸 패션인 500인'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2015년 데뷔 50주년 기념 전시 개최 후에도 나이가 무색하게 전방위로 활동하고 있다.

 이 같은 대가임에도 24일 '메디아' 개막에서 드러날 의상에 대한 만족도를 묻자 "디자이너에게 만족은 없다"고 웃었다.

 다만 "연출님에게 '나는 클래식은 못한다'고 했어요. 심플하고 미니멀하게 가자고 했는데 리허설 할 때 혜영 씨가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데 정말 아름다워서 연출자와 동시에 '빽'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혜영 씨도 소리를 지르고. 호호."

 진태옥은 컬레션의 런웨이와 연극무대에 공통점이 많다고 했다. "런웨이도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드라마가 있어야 해요. 저는 그걸 늘 주장하죠. 기획을 할 때부터 테마를 가지고 하니까 연극과 공통점이에요. 그러나 런웨이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서 제 메시지지만 연극은 공동 작업이라 연출자의 메시지를 잘 전달해야 하죠."  

 무대의상은 그러나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드라마의 완성편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에요. 의상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앞으로도 연극 무대에 더 참여하고 싶어요. 너무 재미가 있어요. 호호"

 세계적인 수퍼모델 케이트 모스가  쇼 시작 시간인 오후 6시30분에 딱 맞춰 와 마음을 졸이다가도 런웨이에서 분위기를 단숨에 장악해 한숨을 돌린 이야기 등 한류 1세대인 진태옥의 에피소드는 무성하다.

【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연극 '메디아'에서 의상 제작을 맡은 진태옥 패션디자이너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7.02.23.  bjko@newsis.com

【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연극 '메디아'에서 의상 제작을 맡은 진태옥 패션디자이너가 2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7.02.23.  [email protected]

 하지만 정작 본인은 "더 국제적으로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외국에 나갈 때 마케팅, 즉 포장을 잘 해야 합니다. 홍보만 잘 되도 호응이 커요. 인물과 스토리텔링을 잘 만들어주면 능히 승산이 있죠. 저는 그걸 못하고 돌아와 항상 거기에 대한 갈증이 있어요. 저는 못했지만 후배들이 해야 합니다. 나라가 도와주면 가능해요. 기금을 조성하고 기업이 도와주고요."

 최근 매진 사례를 기록한 국립무용단 '향연' 등 무용 연출로도 폭을 넓힌 패션 디자이너이자 진태옥을 평소 존경해온 정구호를 눈여겨보고 있다.

 "정구호 씨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쇼를 여는데 초청을 해서 갔어요. 보고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죠. (정구호가 의상을 맡은 국립무용단의) '묵향'도 봤는데 미니멀한 것에 감동을 받아 구호 씨와 함께 울기도 했어요. 구호 씨는 외국에 나가야 합니다."

 '글램록의 선구자'인 데이비드 보위 팬이고, 세계 팝 시장을 휩쓴 아델의 노래들을 런웨이에 직접 선곡하는 진태옥의 상상력과 창의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첫째는 철이 덜 들어서이고 다음은 호기심이 많아서라고 할까요?"라고 웃었다.

 그러면서 '디자이너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디자이너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요. 그래야만 디자인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저 같은 경우는 뜯어내려고 해요. 전체를 위해서는 너무 아까워도 빼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다 보면 모델들도 빼야 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참 잔인하다'는 생각에 안타깝고 눈물이 나죠. 경우는 다르지만 아마 메디아가 자식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그 부분에서 한참 울었어요. 이 작품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 이야기더라고요. 거기에 저와 우리 인생이 있고요." 4월2일까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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