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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번들'로 시작된 서울시향 새로운 탄생

등록 2017.03.12 10: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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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티에리 피셔 사이클 I : 트룰스 뫼르크와 쇼스타코비치. 2017.03.012. (사진 = 서울시향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티에리 피셔 사이클 I : 트룰스 뫼르크와 쇼스타코비치. 2017.03.012. (사진 = 서울시향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김나희 클래식음악·무용 칼럼니스트 = 지난 9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서울시향은 새로 부임한 수석 객원 지휘자 티에리 피셔의 지휘봉 아래 '1번들'을 선보였다.

 첫날은 롯데 콘서트홀, 이튿날은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에서 청중들과 만나며 의미심장한 선언과도 같이, 서울시향의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  

 2014년 12월 이후 서울시향은 크고 작은 송사에 휘말리며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내부갈등이 송사로 번지며 정명훈 전 음악감독은 2015년 12월을 끝으로 계약을 종료했다.

 정명훈의 설득과 헌신으로 10년을 함께했던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 역시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악장을 겸하며, 메인 선율을 주도하는 바이올린 파트의 보잉과 프레이징을 결정하던 그의 공백은 오케스트라 전체 기량에 여파를 미쳤다.

 수석들의 공백에 음악감독과 상임지휘자가 없는 상태로 1년 넘는 시간을 지나온 서울 시향은 객원지휘자 체제로 위기 상황을 대처해나갔지만, 서너 번 리허설을 하고 떠나가는 객원지휘자로는 오케스트라의 성장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한 현실이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갈 지휘자의 존재가 절실했다. 선장을 잃고 풍랑을 만나 표류하는 배의 조타석에 설 수 있는 항해사와 같은 수석객원지휘자  두 사람, 마르쿠스 슈텐츠와 티에리 피셔의 등장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난 1월 마르쿠스 슈텐츠는 뜨거운 집중력으로 독일 레퍼토리를 선보여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스위스 출신의 지휘자 티에리 피셔는 이번 공연에서 서울시향의 또 다른 수석객원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탄생'을 기대하게 하는 연주를 들려줬다.

 하이든 교향곡 1번,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1번, 브람스 교향곡 1번은 제각각 18,19,20세기의 '1번들'로 '서울시향 수석객원지휘자로서의 첫번째 무대임을 강조하기 위한' 티에리 피셔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서울=뉴시스】티에리 피셔 사이클 I : 트룰스 뫼르크와 쇼스타코비치. 2017.03.012. (사진 = 서울시향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티에리 피셔 사이클 I : 트룰스 뫼르크와 쇼스타코비치. 2017.03.012. (사진 = 서울시향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시향은 십여년 만에 처음으로 하이든을 연주하며 공연의 서막을 올렸다. 티에리 피셔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도 단순한 듯한 선율 안에 숨어있는 악상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어진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1번은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현존 첼리스트들 중 가장 뛰어난 기량과 놀라운 음악성을 갖춘 트룰스 뫼르크는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할 경이로운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을 선사했다.

 큰 키의 그가 몬타나냐 첼로를 들고 들어와 넉넉하고 깊고 기품있는 음색으로 첫 주제선율을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 걸쳐 늘 표 구하기가 힘들 정도로 청중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트룰스 뫼르크는 경이로움 그 이상의 연주자였다. 그는 서두름없이, 믿을 수 없는 기교로 가득한 모든 패시지를 자신만의 템포로 들려주었다.

 찬란하게 눈부신 풍경 앞에서 눈에 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아름다움을 최대한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손을 뻗어 만지고, 그 향기를 맡고 혀로 맛본다면 이랬을까. 그만큼 총체적이고도 강렬한 경험으로 만나는 압도적인 쇼스타코비치였다.

 처절하게 짓밟히고 훼손되는 폭력적인 분위기 속에서, 역설적으로 그의 몬타나냐가 빚어내는 음들은 손상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엇처럼 빛났다.  

 불과 반세기 전 스탈린 치하에서 쇼스타코비치가 경험한 폭력과 억압, 모순의 시대에, 여전히 꿈꾸고 노래하는 개인적 자아가 담긴 2악장의 서정성은 첼레스타와 함께 초자연적인 원시의 어딘가로 청중들을 데려가며 절정에 이르렀다.

 3악장 카덴차에서는 느린 템포로 피치카토와 더블스토핑, 16분음표로 반복되는 주제 선율을 들려줬다. 앙코르 바흐 무반주 조곡의 사라방드에서 그는 한없이 넉넉하고 깊은 소리로 홀을 가득 메워왔고, 쇼스타코비치로 한껏 달아올랐던 청중들은 모두 숨죽여 귀기울였다.  

【서울=뉴시스】티에리 피셔 사이클 I : 트룰스 뫼르크와 쇼스타코비치. 2017.03.012. (사진 = 서울시향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티에리 피셔 사이클 I : 트룰스 뫼르크와 쇼스타코비치. 2017.03.012. (사진 = 서울시향 제공)  [email protected]

 인터미션 이후 이어진 브람스 1번은 티에리 피셔가 서울시향에 앞으로 무엇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레퍼토리였다. 그동안 서울시향이 들려줬던 브람스와는 달리, 완전히 새로운 브람스였다.

 노래하는듯 멜로디 라인을 특별히 강조하지도 않았고, 강약을 극단적으로 과장해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지도 않았다. 음표 하나하나와 전체적인 구조에 집중한 담백하고도 설득력있는 해석이었다.

 호흡하는듯한 자연스러운 프레이징으로 지나친 과장이나 장식없이 정직하게 쌓아올라가며 마지막 4악장에서 과잉없이 분출되는 연주에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무려 20년을 넘게 쏟아부은 브람스의 고민과, 음악에 대한 헌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간 자주 연주했던 레퍼토리를 정형화된 스타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듣는 연주처럼 신선한 해석으로 들려줄 수 있다는 면에서, 내일을 향해 가는 '새로운 탄생'을 다짐하는 첫걸음에 걸맞는 연주였다.

 잔향의 여운이 오래 남는 9일 공연은 롯데홀에서는 중저음부가 섞이며, 브람스적 파토스가 보다 낭만적으로 전해졌고, 10일 예술의 전당에서는 다소 소리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는 상주할 전용홀을 갖지 못한 서울시향이 감수해야 할 한계이기도 하다.

 수석객원지휘자와 함께 오케스트라 역량의 외연 확장은 물론, 폭넓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지난 11년간의 성장과는 성격을 달리한 균형감있는 오케스트라의 성장을 기대하게 하는 무대였다. 1번들로 시작된 '새로운 탄생'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클래식음악·무용 칼럼니스트이자 M&A 컨설턴트다. 프랑스 파리에서 피아노·하프시코드·음악사를 전공했다. 월간 '객석', '중앙SUNDAY', 격월간 'Axt' 등에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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