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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있는 피붙이 안고 싶다" 구순 비전향 장기수의 마지막 소원

등록 2017.07.23 11:3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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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등은 오는 25일 광주 동구 YMCA 백제실에서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준) 결성' 기자회견을 연다고 23일 밝혔다. 사진은 광주지역의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90)씨가 지난 21일 광주 동구 한 찻집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 2017.07.25. sdhdream@newsis.com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등은 오는 25일 광주 동구 YMCA 백제실에서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준) 결성' 기자회견을 연다고 23일 밝혔다. 사진은 광주지역의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90)씨가 지난 21일 광주 동구 한 찻집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 2017.07.25.  [email protected]


 광주지역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씨
 공작원 남파 29년 복역···전향 강요에 저항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꿈에서만 보던 아내를 만날 수만 있다면 꼭 안아주고 싶어요."

 광주지역의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90)씨는 23일 "꿈 속에 나온 아내는 연애할 때 모습 그대로였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 같이 말했다.

 56년째 피붙이를 꿈에서만 보고 있는 그의 마지막 소원은 송환이 이뤄져 북한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는 것이다.

 광주 북구의 한 아파트에 사는 서씨는 3개월 전 지병으로 입원,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남은 여생 동안 북녘땅에서 처자식과 함께 살고 싶다'는 그의 간절함이 삶에 대한 의지로 이어진 듯 보였다.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등은 오는 25일 광주 동구 YMCA 백제실에서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준) 결성' 기자회견을 연다고 23일 밝혔다. 사진은 광주지역의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90)씨가 지난 21일 광주 동구 한 찻집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 2017.07.25. sdhdream@newsis.com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등은 오는 25일 광주 동구 YMCA 백제실에서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준) 결성' 기자회견을 연다고 23일 밝혔다. 사진은 광주지역의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90)씨가 지난 21일 광주 동구 한 찻집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 2017.07.25.  [email protected]


 서씨는 6·25한국전쟁 당시 월북해 인민군에 입대했다.

 1961년 8월9일 아내와 두 아들(당시 5살·3살)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안내원들과 함께 공작원으로 남파됐다. 한 달 뒤 월북하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이후 구형과 선고를 합해 사형 소리만 6번을 들었지만, 최종 판결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아 '쌍무기수(무기형이 두 개)'가 됐다.

 1961년 9월부터 1990년 9월까지 광주·대전교도소 등지의 독방(0.75평)에서 옥살이를 했다.

 이 과정에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했다.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이 만든 사상전향공작반은 장기수들을 고문하며 사상과 양심의 자유마저 제한하려고 했다. 

 서씨도 1974년 고문 후유증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거동도 불편한 상태다.

 서씨의 성한 곳 없는 몸은 이념 대결로 이어져온 남북 관계의 모순과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사상 전향 강요가 집요했다. 산소가 부족한 진공관에 가두거나 손발을 묶어 매단 채 몽둥이로 때리고, 바늘로 쑤시는 방식의 고문이 이어졌다"며 "독서·운동·식사를 제한하고 영치금과 침구류를 빼앗는 일도 잦았다"고 말했다.

 서씨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도 전향 강요에 저항,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서씨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 민주질서에 어긋나지 않게 살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29년 만에 출옥했지만, 인권 탄압은 이어졌다. 

 지난 2015년까지 25년 동안 보호감찰법에 따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고, 연좌제로 가족까지 징역을 살거나 취업을 할 수 없었다.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등은 오는 25일 광주 동구 YMCA 백제실에서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준) 결성' 기자회견을 연다고 23일 밝혔다. 사진은 광주지역의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90)씨가 지난 21일 광주 북구 자신의 집에서 27년간 쓴 일기장을 펼쳐보고 있는 모습. 2017.07.25. sdhdream@newsis.com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등은 오는 25일 광주 동구 YMCA 백제실에서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준) 결성' 기자회견을 연다고 23일 밝혔다. 사진은 광주지역의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90)씨가 지난 21일 광주 북구 자신의 집에서 27년간 쓴 일기장을 펼쳐보고 있는 모습. 2017.07.25.  [email protected]



 고흥에 잠시 머물다 1991년 7월부터 광주에서 통일운동을 하며 홀로 지내온 서씨는 출옥 당일부터 이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메모지 28권 분량)를 쓰고 있다.

 일기 머리말에는 '나는 나왔다. 전향서가 아닌 서약서를 쓰고 나왔다. 30년의 인생이 빼앗긴 곳에서 나는 나왔다. 그렇다고 완전한 자유가 주어질까'고 쓰여 있었다.

 일기를 기자에게 보여주던 서씨는 "인생의 선택에 아쉬움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부끄럽게 살지 않았다"고 했다.

 남한으로 내려오기 전 처자식의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았을 뿐이다.

 서씨는 "아들 둘을 낳고 흐뭇해하던 아내를 잊을 수 없다"면서 "20년 전 독일 교포로부터 (처자식이)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는데, 살아있다면 꼭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분단의 아픔이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북한을 통일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적대시하는 구조와 시선부터 바꿔야 한다"며 "공감을 토대로 우리 민족 간 자주·평화적 통일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가족과 함께하는 희망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도 그의 일기장에는 절절한 그리움과 송환을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한편 광주시민사회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서씨의 북송을 추진하고 있다. 오는 25일 광주 동구 YMCA 백제실에서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준비위) 결성' 기자회견이 열린다.

 서씨는 ▲1927년 전남 신안군 팔금면 팔금도에서 5남1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50년 6월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 중퇴 ▲1953년 인민군 전역 뒤 강원도 천내군 중학교에서 교원 생활 ▲1955년 아내와 결혼 ▲1958년 12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1959년 원산교원대학 교원으로 재직하며 정치·경제·지리·역사 등을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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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등은 오는 25일 광주 동구 YMCA 백제실에서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준) 결성' 기자회견을 연다고 23일 밝혔다. 사진은 광주지역의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90)씨가 지난 21일 광주 북구 자신의 집에서 공개한 일기장 머리말. 2017.07.25. sdhdream@newsis.com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등은 오는 25일 광주 동구 YMCA 백제실에서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준) 결성' 기자회견을 연다고 23일 밝혔다. 사진은 광주지역의 유일한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90)씨가 지난 21일 광주 북구 자신의 집에서 공개한 일기장 머리말. 2017.07.25.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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