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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폭동에 찌든 도시가 아니었다" 미국 선교사의 5·18기록

등록 2017.07.25 1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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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시스】 1980년 5월21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이날 계엄군은 집단발포를 자행,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으며 항쟁기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2017.07.25. (사진=뉴시스 DB) photo@newsis.com

【광주=뉴시스】 1980년 5월21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이날 계엄군은 집단발포를 자행,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으며 항쟁기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2017.07.25. (사진=뉴시스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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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시스】배동민 기자 =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지켜본 미국 선교사의 일지가 37년 만에 공개됐다.
 
 5·18기념재단은 1980년 5·18 당시 광주에 거주하던 미국인 선교사가 작성한 5·18 관련 일지를 발굴·번역해 25일 공개했다.
 
 일지는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가 지난 1월18일 기념재단에 기증한 5·18 관련 기밀해제 문서에 포함됐다.
 
 재단은 조사결과 미국 정부가 1997년 광주시에 제공한 기밀 해제 문서에도 해당 일지가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5·18 사태의 요약된 회고'라는 제목의 일지는 1980년 6월 5~6일 작성됐다. 작성자는 기밀이 해제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일지에는 5·18이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 시민들의 폭동이나 공산주의들과 불순분자의 책동이 전혀 없었고 공수부대가 물러간 뒤 광주는 매우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공동체적 분위기였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다.
 
 또 5·18은 광주 시민들이 민주주의나 정치 발전 등과 같은 거창한 구호보다 잔인한 국가폭력 앞에서 하나로 뭉쳐서 자신들을 지켜낸 숭고한 인본주의적·공동체적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일지 마지막 부분에서는 ▲광주는 폭동에 찌든 도시가 절대 아니었다 ▲광주는 위기 아래 시민들이 하나로 뭉친 도시였다 ▲광주사태는 광주 시민들을 향한 (공수부대와 중앙정부의)야만적 행위 때문에 발생했다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자제력과 평정심 또한 놀라울 따름이다 등 5·18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요약하기도 했다.
 
 기념재단 측은 "미국인 선교사라는 신뢰할만한 지위에 있는 인사가 작성한 최초의 영문 기록"이라며 "당시 미대사관은 '지금까지 우리가 본 보고서 중 가장 균형잡힌 광주사태 기록이자 분석'이라는 평가와 함께 '신중하게 다루어줄 것'을 요청하며 미국 국무부에 기밀전문 형식으로 보냈다"고 설명했다.
 
 이어 "광주항쟁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가진 미국의 정책당국자들과 워싱턴 정가에 최초로 전달된 공식 영어 문건"이라며 "미국의 고위관료들이 가장 먼저 열람한 공식기록이라는 점에서 5·18 이후 정책 기류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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