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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난 문학인들 "블랙리스트, 해결된 것 아무 것도 없다"

등록 2017.09.21 15: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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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난 문학인들 "블랙리스트, 해결된 것 아무 것도 없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문화예술 제도개선 위한 현장 토론회
김성규 시인 "조사범위 넓혀 블랙리스트 작가들 검열 확인해야"
서영인 평론가 "문화예술지원 투명하고 체계적으로 정해져야"
강경석 평론가 "문인·비문인 구분 전제로 지원 정책 시스템 문제"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라는 잘 알려진 개념이 있어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취지입니다. 블랙리스트 파문은 지원도 안 하면서 간섭만 늘린 결과였습니다."(강경석 문학평론가)

"국가가 직접 블랙리스트를 걸러낸 것 뿐만 아니라 지원 사업 선정단체와 협력해 작가들을 걸러냈는지 진상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김성규 시인)

21일 서울 망원동 창비 카페에서 열린 '제2차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및 공정한 문화예술정책 수립을 위한 문학 분야 현장 토론회'에서는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대한 강한 성토가 이어졌다.

이날 토론회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이하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주최로 진행됐으며, 문학인들은 블랙리스트를 둘러싼 생각을 거침없이 털어놨다.

서영인 문학평론가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문제가 사회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2015년 문화예술위원회 지원사업 선정과정에서 밝혀진 파행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문화예술위원회를 예로 든다면 부당한 지시나 외압,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자행되는 것에 대한 내부적 저항이 전혀 불가능했다"며 "상사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는 말로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 시스템의 심각성이 무마됐다. 책임자 몇 명의 처벌은 절대로 근본적으로 망가진 시스템을 복원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뿔난 문학인들 "블랙리스트, 해결된 것 아무 것도 없다"

서 평론가는 "문화예술지원은 1년 단위로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며 "사업 진행은 1년 단위가 되더라도 장기간, 지속가능하고예측가능한 계획 하에서 투명하고 체계적으로 사업의 방향과 내용이 정해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전 정부의 부패·무능·농단은 탄핵과 주요 관계자들의 사법처리, 정권교체로 사필귀정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아직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해결의 방향을 찾는 것조차 진통 속에 있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가 부디 그 해결의 방향을 찾는 실마리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성규 시인은 "예술위원회나 문체부 공모사업 선정 단체들이 행사를 진행할 때 세부 사업의 작가들 명단까지 블랙리스트로 걸러냈다는 소문들이 있다"며 "작가들이 행사에 초대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배제되었다는 통보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관계자와 상의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작가가 바뀌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블랙리스트 조사 범위를 넓혀 지원 사업 선정된 단체들과 협력해 블랙리스트 작가들을 검열했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경석 문학평론가는 '문학·예술 지원정책과 시민참여'를 주제로 발표했다. 강 평론가는 예술가와 비예술가 구분 기준의 모호성, 창작활동과 비창작활동 구분 기준의 모호성을 현장에서 자주 갈등을 빚는 문제로 꼽았다.

그는 "문학인과 비문학인을 가르는 기준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며 "지원사업 실무를 맡고 있는 공공부문의 기획자들 사이에서는 흔히 '문학은 그래도 등단제도라는 게 있지 않냐'는 말들이 오가곤 한다. 일간지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에 당선되는 절차를 말하는 것인데 지역의 동인 규모에서 발간하는 문예지까지 합하면 그 수가 너무 많고,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활동하는 문인도 이미 상당수"라고 설명했다.
뿔난 문학인들 "블랙리스트, 해결된 것 아무 것도 없다"

강 평론가는 "누구나 문인이 될 수 있는 현실 자체를 문제 삼자는 것이 아니며 그럴 필요도 명분도 없다"며 문인과 비문인의 명확한 구분을 전제로 한 지원 정책 시스템이 문제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창작활동과 창작활동 아닌 것의 구분 또한 생각보다 쉽지 않다"며 "공공 예산이 요구하는 '투명성'의 논리는 예산의 집행내역이 규격화된 회계절차를 따르도록 강제하고 있어 현장의 요구와 모순을 일으키곤 한다. 문학 영역의 경우 대개 발간비(단행본 제작비) 지원으로 예산 지출항목을 한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곤 한다. 이는 '자비 출판'의 확대를 유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서영인 평론가는 "블랙리스트 문제가 문학인 개인에게 주어지는 지원금 문제로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며 "정책 담당자 뿐 아니라 문학인들 역시 이러한 공공성이 독자들, 대중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구체적으로 실감될 수 있는 길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찾아 나가야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소수의 인기작가가 아니라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기발하고 참신한 문학을 독자들이 더 다양하게 만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의 문화적 기반은 더 풍부해지고, 이런 문학에 기대어 우리의 삶은 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법적 판단으로 중단되지 않는 수많은 입장과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토론될 수 있으려면 이러한 문화적 기반이 더욱 탄탄하게 구축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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