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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일 왔다, 미국유랑 칠순배우의 평창아리랑

등록 2017.09.22 16:4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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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일 왔다, 미국유랑 칠순배우의 평창아리랑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1970~80년대 톱스타 한지일(70)이 미국 시카고에서 돌아왔다. ‘국외 이북도민 고국방문단’에 황해도민 자격으로 초청받아 다녀간 지 2년 만이다.

알려진대로 한지일은 10년 전 빈털터리로 미국에 갔다.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탓에 100억원대 재산을 날리고 가정도 잃은 뒤였다.

현지에서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노인, 탈북자, 청소년을 위한 봉사활동을 계속했다. 국내에서도 한지일은 1971년 말부터 매해 5~6차례씩 수십년 간 양로원을 찾아다닌 봉사의 아이콘이었다. 이번 귀국 전에도 로스앤젤레스 윌셔 양로보건센터, 부에나파크 행복양로보건센타를 찾아가 노인 450명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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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일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얘기부터 꺼냈다. 2014년 스스로 ‘평창 홍보대사’가 됐다. 평창동계올림픽 로고와 엠블럼 비슷한 것을 구해 트레일러에 그려 넣은 뒤 미국 곳곳을 누볐다.

“시카고에서 차를 몰고 7~8번 주유를 해가며 사흘 걸려 로스앤젤레스로 가면서 평창올림픽을 광고했다. 차 뒤에 단 트레일러를 보고 ‘이게 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코리아의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린다’고 소개했다. 사우나나 모텔에서 자면서 그렇게 뉴욕, 필라델피아, 댈러스, 애틀랜타, 텍사스, 워싱턴, 버지니아, 메릴랜드, 오하이오 등지를 누볐다. 아마 지구 세 바퀴 반은 돈 거리일 것이다.”

한지일 왔다, 미국유랑 칠순배우의 평창아리랑

비용은 “장돌뱅이” 삯으로 충당했다. 트레일러에서 물건을 꺼내 한인 마트에서 팔았다. 미국생활 10년 동안 월수입 5000달러가 최고였다. 요즘은 2000달러 전후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평창올림픽에 매달렸다. 힘이 남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한지일 왔다, 미국유랑 칠순배우의 평창아리랑

한지일은 2005년 SBS TV ‘그 여름의 태풍’ 카메오 출연을 끝으로 드라마와 영화에서 사라졌다. 여주인공 정다빈(1980~2007)의 죽음을 계기로 자살예방 전도사로도 활동했다.
 
한지일 왔다, 미국유랑 칠순배우의 평창아리랑

한지일은 당시로서는 드문 고학력 연예인(경희대 신문방송학)이다. 1979년 미국의 성인여성지 ‘플레이걸’이 누드모델 제의를 했을 정도로 돋보이는 외모다. 성인비디오 ‘젖소부인 바람났네’ 시리즈 제작자로 유명하지만, 한국 미남배우 2세대로 독보적인 스타덤을 구가했다. 1978년 ‘경찰관’으로 대종상 신인상, 1979년 ‘물도리동’으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1988년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신혜수) ‘아다다’의 남자주인공, 이듬해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 ‘아제아제바라아제’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따냈다.

한지일은 “미국에서 막일 27가지를 하면서 버텨왔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일거리가 없어지는 것이 무섭다. 떠돌며 살아가는 데 한계를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아주 들어온 것인지, 다시 시카고로 가야할는지는 국내 팬들과 연예계의 관심도에 달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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