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상을 위한 위로가, 관객을 위한 희망가
【서울=뉴시스】 가무극 '꾿빠이, 이상'. 2017.09.24. (사진 = 서울예술단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서울예술단의 신작 가무극(뮤지컬) '꾿빠이, 이상'은 체험극이다. 관객은 보는 것을 넘어 극의 일부가 된다. 주인공인 시인 이상(李箱·김해경·1910~1937) 삶의 동반자(同伴者)로 호명된다.
회당 100명의 동반자는 공연장인 CKL스테이지에 들어서기 전 저마다 다른 모양의 가면을 받는다. 긴 통로를 지나가는 사이 "한 사람의 마지막 얼굴을 보러 가네"라는 육성이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가면을 쓴 동반자들은 한켠에 이상이 누워 있는 관을 맞닥뜨리게 된다.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유학생들이 이상의 데드 마스크(dead mask)를 뜨는 장면이 연상된다. 가무극의 원작인 작가 김연수의 동명소설에도 묘사된 부분이다.
이상의 데드마스크는 친구가 국내로 가져와 고인의 어머니에게까지 보인 일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김 작가가 소설을 쓰게 된 이유다. 당사자의 얼굴을 가장 정확하게 후세에 전할 매개체가 없다는 건, 그를 상상하는 촉매제가 된다.
이상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아무도 자세히는 모른다. 그 만큼 신비에 쌓여 있는 인물도 드물다. 이 모호함을 육화(肉化)한 것이 가무극 '꾿빠이, 이상'이다.
【서울=뉴시스】 가무극 '꾿빠이, 이상'. 2017.09.24. (사진 = 서울예술단 제공) [email protected]
일반 공연장의 프로시니엄(액자틀) 무대도 필요 없게 됐다. 가무극 '꾿빠이, 이상'은 공연장 모든 곳이 무대이자 객석이다.
한 가운데 삼각 모양의 무대가 불안정하게 놓여 있고, 불규칙적인 높낮이의 담들이 그 주변을 둘러싼다. 미니멀하지만 상상력의 여지는 남겨두는 무대디자이너 여신동의 손길이 묻어 있다.
소설은 3인칭 시점으로 세 명의 인물이 이상의 흔적을 찾아 나서지만, 극은 1인칭 시점으로 이상(김해경)이 스스로의 얼굴을 찾아 나선다.
【서울=뉴시스】 가무극 '꾿빠이, 이상'. 2017.09.24. (사진 = 서울예술단 제공) [email protected]
연출가 오루피나는 회화적인 방법으로 인물 그리고 공연장을 채워나간다. 수십 줄의 붉은 레이저를 위에서 아래로 쏘아 만들어낸 감옥 같은 이상의 내면, 프로젝터를 통해 공연장 곳곳에 수놓아지는 이상의 글들.
관객들은 자신이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른 얼굴, 글을 보게 되고 자신만의 이상을 상상해 나가게 된다. 갤러리 안 행위예술처럼 배우들, 아니 인물들은 저마다의 공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산다. 무용에 특화된 서울예술단답게 안무가 예효승이 안무한 무용 장면들은 이상의 격정의 내면을 끄집어낸 듯 곳곳에서 휘몰아친다.
극의 감각적인 연출을 결정적으로 돕는 건 러닝타임 90분 내내 온갖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이다. 김성수 음악감독이 이끄는 10인조 앙상블은 미니멀리즘, 실내악, 브릿팝 그리고 규정할 수 없는 장르를 오가며 몰입감을 선사한다.
김 감독이 작곡가 예명인 '23'으로 작곡한 곡들은 특히 분절·침묵까지 음악으로 승화시키며, 텅 빈 공간을 오선지 삼아 이상의 모호함을 음표로 흩뿌려낸다.
【서울=뉴시스】 가무극 '꾿빠이, 이상'. 2017.09.24. (사진 = 서울예술단 제공) [email protected]
관객들, 아니 동반자들은 이상이 얼굴을 찾는 걸 심적으로 돕다가 각자의 얼굴을 찾는 지경에 이른다. 김연수·오세혁 작가가 '이해가 불가능한 것, 그것이 제 삶이나 저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해 모호한 이상에 빠져든 것처럼, 공연 내내 해답 대신 느낀 복잡함이 결국 자신의 내면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극은 이처럼 '이상을 위한 위로가'이자 '관객을 위한 희망가'가 된다.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 속 구절은 이 해석을 함축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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