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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26명 서울시 첫 확인

등록 2017.12.11 1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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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안지혜 기자 =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교수연구팀은 남태평양 '트럭섬'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도 있었다는 것을 최초로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hokma@newsis.com

【서울=뉴시스】


 서울시-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교수팀 명부·사진 확인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
 

【서울=뉴시스】박대로 기자 =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교수연구팀은 남태평양 '트럭섬'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도 있었다는 것을 최초로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은 이날 시청사에서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를 개최하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 발굴·조사·분석한 결과를 발표한다.

 트럭섬(Chuuk Islands)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함대의 주요기지로 많은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기지 건설 등을 위해 강제 동원됐던 아픈 역사가 서려있다.

 트럭섬의 정확한 명칭은 축(chuuk)이다. 축 제도(chuuk Islands)는 미크로네시아연방을 구성하는 4개 주 가운데 하나이자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섬으로 태평양 남서쪽에 위치하며 얍·코스라에·폰페이와 함께 미크로네시아연방을 이룬다. 일본인들은 이 섬을 트루크 제도(トラック諸島)라고 불렀는데 일본식 발음인 '토라크'를 접했던 한국은 일반적으로 '트럭'으로 불러왔다.

 시는 당시 미군이 작성한 전투일지, 조선인 '위안부'들이 귀환 당시 탑승했던 호위함 이키노(Escort IKINO)호의 승선명부, 귀환 당시 사진자료, 일본인과 조선인들의 귀환을 다룬 뉴욕타임즈 기사(1946년 3월2일) 등 자료를 발굴하고 비교·검토해 조선인 '위안부' 26명의 존재를 밝혀냈다. 그동안 증언으로만 있었던 트럭섬의 조선인 '위안부'가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한 것이다.

 전투일지에 따르면 종전 후 귀환한 총 1만4298명 중 3483명이 조선인이다. 그 중 군인이 190명, 해군 노무자가 3049명, 민간인이 244명이다. 조선인 '위안부' 들은 트럭 환초에 속한 드블론(Dublon)에서 1946년 1월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귀환했다. 이 배에는 조선인 '위안부' 26명과 함께 아이 3명이 탑승했다.

 함께 발굴된 뉴욕타임즈 기사 '트럭의 일본인들은 포로가 아니다(Japanese On Truk Are Not Prisoners)'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귀환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구절은 조선인 '위안부'들의 귀한을 다루고 있다. 이 기사는 '위안부'를 27명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이는 아이 3명 중 1명을 '위안부'로 분류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이키노호의 승선명부에 따르면 총 368명이 탑승했고 이 중 조선인은 249명이었으며 여성과 아이는 29명이었다. 이 명단에는 조선인 여성 26명과 아이 3명의 이름·직업·조직·주소가 나타나있다.

 이름은 대부분 창씨명으로 돼있고 직업은 여성의 경우에는 모두 노동자(Labourer), 아이의 경우에는 무직(Unemployed)로 돼있다. 다른 문서와의 비교를 통해 이 여성들이 '위안부' 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이 과정에서 정부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트럭섬으로 끌려갔다고 밝힌 유일한 증언자인 고(故) 이복순씨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했다. 연구팀은 당시 작성됐던 제적등본을 추적하고 가족 등 주변인 확인을 거쳐 이 인물이 이복순씨와 동일인임을 확인했다.

 이밖에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은 생전 '위안부' 피해사실을 고백했지만 '위안부' 피해자로 정부에 등록하기도 전에 숨을 거둔 고(故) 하복향씨가 '위안부' 피해자임을 증명했다. 이는 2001년 숨을 거둔지 16년 만이다. 본인 증언이 아닌 사료를 통해 피해사실을 증명한 것은 이번이 최초다.

 연구팀은 필리핀으로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의 포로 심문카드 33개를 확보해 사진·생일날짜·주소지·손가락지문 등을 토대로 역추적하고 지문 일치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하씨가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증명했다.
 
 경북 경산에서 자란 하씨는 공장에 일하러 가면 집 한채를 살 수 있다는 말에 1941년 만 15세 나이에 소개인을 따라 타이완으로 갔다. 그러나 도착한 곳은 공장이 아니라 '색시 장사'를 하는 곳이었고 그곳 업주는 하씨 등 여성 40여명을 데리고 필리핀 마닐라로 갔다. 하씨는 그곳에서 3년여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하씨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자신의 과거를 밝히기 두려워 피해신고를 하지 않고 살아오다 2001년 2월 한국정신대연구소 고혜정 소장을 만나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고백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후 두 사람은 2번째 만남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하씨는 이후 열흘도 지나지 않아 소천했고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도 못한 채 피해사실도 함께 묻히게 됐다.

 정부에 공식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239명이지만 하씨처럼 피해사실을 밝히지 않아 공식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피해자가 많을 것으로 시는 보고 있다.

 시는 '위안부' 피해를 대중에게 알리고 자료를 축적하기 위한 활동을 내년에도 이어간다. 시는 지난해부터 2년간 발굴·축적해 온 일본군 '위안부' 사료를 바탕으로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1·2권을 내년 1월 출판할 예정이다.

 2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한국·중국·일본의 '위안부' 전문가와 단체를 초청, 각국 '위안부' 자료 성과를 공유하고 향후 '위안부' 자료 조사의 과제와 교류, 협력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자료를 검토한 박정애 교수(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는 "진상규명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기본전제"라며 "이를 위해 자료의 체계적 조사와 수집, 연구해제, 공공적 제공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엄규숙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장은 "영화 '아이캔스피크'처럼 우리 주변엔 여전히 피해자였어도 공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많을 것"이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아직 갈 길이 먼만큼 서울시는 지속적으로 꾸준한 자료 조사·발굴·분석을 통해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축적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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