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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칼럼]베트남 양민학살 위령비와 文대통령의 사과

등록 2018.03.25 08: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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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칼럼]베트남 양민학살 위령비와 文대통령의 사과

【서울=뉴시스】김호경 사회부장 = 지난 2009년 8월26일, 베트남 중앙에 위치한 꽝남성의 대기는 지글지글 뜨겁기가 이를 데 없었다. 전날 머문 호찌민시에서는 한창 우기(雨期) 임을 입증하듯 갑자기 새까매진 하늘에서 장대비가 광포하게 쏟아져 거리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우기가 아닌 꽝남성에서는 구름 한 점 걸치지 않은 강렬한 백색 태양이 바짝 마른 시골 국도를 가일층 달궈댔다.

한국군 야전의 발자취는 꽝남성을 비롯한 중부 지방에 몰려 있다. 한반도 면적의 약 1.5배인 베트남은 남북으로 1650㎞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그 중심부에 황석영 소설 <무기의 그늘> 무대가 됐던 다낭이 있고, 거기서 남쪽으로 400㎞쯤 내려가면 주월한국군 야전사령부가 있던 냐짱(베트남전을 다룬 소설을 통해 주로 '나트랑'으로 알려졌었다)이 나온다.

다낭과 냐짱 두 도시 사이에 베트남에서도 가장 가난하다는 꽝남, 꽝나이, 빙딩, 푸옌, 카잉호와 등 다섯 개의 성이 있다. 바로 한국군이 주둔했던 중부지방 5개 성이다. 이중 다낭 바로 아래 위치한 첫 번째 성이 꽝남성이다. 우리 전투부대 가운데 최초 파병된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가 1972년 2월 철수할 때까지 몇 차례 자리를 이동하며 꽝남성 일대에 주둔했다.
[스토리 칼럼]베트남 양민학살 위령비와 文대통령의 사과

베트남 땅을 처음 밟았던 기자는 다낭을 거쳐 꽝남성에서 한국군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운신을 가볍게 하기 위해 가급적 혼자 다니려 했는데, 베트남에서 15년째 봉사활동 중이던 오덕 선교사가 "외진 곳이라 혼자서는 절대 길을 찾을 수 없다. 더군다나 역사적으로 민감한 지역이어서 혼자 서성이다 마을 주민들 눈에 띄면 위험할 수 있다"고 만류했다. 위험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현장에 도착해서 곧 깨달았다.

오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안내인 겸 '보호자'로 동행한 베트남적십자사 소속 현지인들은 기자를 우선 디엔반현 디엔토면으로 이끌었다. 전봇대들만 즐비하게 늘어선 한적한 국도변에 렌터카를 세워놓은 뒤 온통 논밖에 안 보이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들어섰다. 초입에서부터 추모비가 보이는데, 1967년 마을을 덮쳤던 군인들이 주민들을 살상하며 갓난 아이의 발목을 잡아 거꾸로 들어올린 모습 등이 그려져 있었다. 물어보니 그림 속 군인들은 미군이라고 해 일단 안도했다.
[스토리 칼럼]베트남 양민학살 위령비와 文대통령의 사과

빽빽하게 들어찬 벼들 사이에 좁다랗게 난 논두렁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계속 들어갔다. 진흙길이 미끄러워 위태롭게 30분 정도 걸음을 옮기다 보니 마을 후미진 구석에서 불현듯 묘지와 맞닥뜨렸다. 무성한 잡풀에 뒤덮인 비석들이 여기저기 방치돼 있었다. 기단 위에 설치된 위령비가 눈에 들어왔다. '1968년 1월20일, 미군부대와 남조선부대에 의해 주민 145명이 참살당해 그중 82명이 여기 묻혔다.'

이렇게 쓰인 베트남어 문구 아래 희생자 명단 전체가 출생연도와 함께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1966년, 65년, 64년 등 사건 당시 열 살도 안 됐을 60년대 생이 여럿 보였다. 66년생이면 죽음을 맞았을 때 갓 두 살. 기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나, 비문에는 남조선을 뜻하는 'NAM TRIEU TIEN(남주띤)'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각인돼 있었다.

동행한 베트남적십자사의 60대 노인이 조용히 쭈그리고 앉더니 담배 세 개비를 한꺼번에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곤 한 개비씩 공손한 몸짓으로 향로에 꽂으며 망자들을 묵묵히 애도했다. 다들 만감에 사로잡혀 착잡한 표정으로 한동안 머물다 발길을 돌렸다. 뙤약볕이 더욱 뜨거웠다.
[스토리 칼럼]베트남 양민학살 위령비와 文대통령의 사과

이어 비슷한 위령비가 세워져있는 디엔반현 디엔즈엉면 하미마을을 비롯해 두 곳을 더 다녔다. 하미마을은 1968년 2월22일 청룡부대에 의해 피해를 입은 곳이다. 학살당한 주민 135명은 위령비 왼편과 오른편 땅에 나뉘어 무더기로 합사돼 있는 상태였다. 역시 희생자들 명단이 보였는데 1968년생도 눈에 띄었다. 68년생이면 사건 당시 영아다.

한국군은 마을에 들이닥친 뒤 집집마다 다니며 총을 난사하고 불을 질러 여성과 노인, 어린아이까지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생명을 부지한 사람들도 눈을 잃고 발목이 끊어지는 등 불구가 되거나 평생 남을 끔찍한 흉터를 갖게 된 경우가 많았다.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은 이들도 있었다. 생존자 중에는 당시 갓난아기였는데 엄마가 끌어안고 대신 총알을 맞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 사례까지 있었다. 상황을 기억하는 생존자들은 "학살 다음 날 한국군이 불도저 두 대를 몰고 다시 마을에 나타나 시신들이 묻힌 곳을 파헤치며 밀고 갔다"고 증언한다.

하미마을에도 위령비가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도에 월남참전전우복지회라는 한국의 참전군인 단체가 자금을 지원해 설립됐다는 위령비의 뒷면에는 원래 장문의 추도문이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 측이 극도로 낙후돼 있던 벽촌 마을에 학교를 지어주면서 문구의 수정을 간곡히 요청해 결국 지워졌다고 한다.

주민들이 6개월여의 격론 끝에 "역사를 왜곡해서 기록하느니, 차라리 기록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결정하고 문구 전체를 삭제해버렸다는 것이다. 대신 베트남 사람들이 좋아하는 연꽃 문양을 새긴 대리석 판을 덧붙였다.
[스토리 칼럼]베트남 양민학살 위령비와 文대통령의 사과

그 전말은 당시 베트남 한국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며 중부지방 5개 성에 우리 정부의 무상원조 차원에서 총 40개의 초등학교를 지어주는 과정을 실무적으로 주도했던 이용준 전 외교부 차관보의 저서 <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에 상세히 나온다.

취재를 다니며 디엔즈엉면 외곽에 아직 남아 있는 청룡부대 기지 터도 확인했다. 중대본부와 위병소, 부대 막사 건물들이 폐허 속에 을씨년스러웠다.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이 벌인 민간인 학살 사건은 약 80건, 희생자는 9000여 명으로 지난 2000년 집계된 적이 있지만 추정 규모는 이후에도 계속 늘고 있다.

그렇다고 베트남 정부가 한국에 공식적인 사과나 보상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에 쩐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한 것을 두고 '왜 민간인 학살을 직접 언급하며 명시적으로 사과하지 않았느냐'고 비판하거나 아쉬워하는 의견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사자인 베트남 정부가 사과는커녕 과거사에 관한 논의 자체를 반대하거나 불편해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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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정부는 자국 언론에서 혹여 양민학살 관련 문제를 다루면 오히려 보도를 자제하라는 지침을 내리곤 했다. 한국군이 철수한 지 19년 만인 지난 1992년 양국이 수교를 단행했을 때 수교협정 서명식에 참석한 보 반 키엣 베트남 수상은 "과거 두 나라 사이에 불행한 일이 많았으나 이는 양국 국민의 뜻과 무관한 일"이라며 과거사 문제에 일찌감치, 분명하게 선을 그은 바 있다.

베트남 정부는 현실적인 국제외교 관계와 경제발전을 위한 조건, '전승국'으로서의 자존심, 국민 통합 과제 등을 심사숙고해서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방침을 정립했을 것이다. 청와대도 여러 요인을 감안해 진정성을 담되, 발언 수위는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한일 과거사 문제와는 여러 다른 측면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에 나온 설명이 참고가 되겠다.

"가해자는 필요하면 사과하고 보상도 하겠다는데, 피해자측에서는 굳이 말도 못 꺼내게 한다는 점에서도 한일 과거사와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러시아, 영국, 독일을 제외한 모든 열강과 전쟁을 겪었기에 그들 모두에게 감정을 품고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과거를 잊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전 당시 남베트남 진영으로 참전한 국가는 미국 외에 한국,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이들은 그 이전에 이미 베트남을 침략한 바 있는 중국, 일본, 프랑스와 더불어 현재 베트남에 경제 원조나 투자를 제공하는 핵심 국가들이다. 이들과의 협력은 베트남이 세계 최빈국의 오명을 씻고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한 필수 조건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처음 만나는 베트남 인사에게 마치 인사말처럼 과거사 문제를 화두로 꺼낼 때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덮고 미래를 위해 협력하자.' 공산당 간부, 외교부 직원, 전직 베트콩 간부, 지방정부 고관, 언론인, 하다못해 문화예술계 간부나 학생들을 만나도 한국과 베트남 과거사에 대한 반응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만일 한국인들이 정히 베트남인들에게 무언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투자와 경제 협력을 통해 베트남의 경제 발전을 도와달라고. 베트남에 근무하는 동안 똑같은 표현을 수백 차례는 들어야 했다."

문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이 계기가 돼 하미마을 위령비의 추도문을 오랜만에 찾아 읽어봤다. 혹시나 하고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니 마침 지난 11일에 하미 학살사건 50주기 위령제가 현지에서 열렸고 한국에서도 여러 사람이 민간인 참배단을 구성해 참석했다고 한다.

양국은 '불행한 역사'를 남다른 동반자 관계의 밑거름으로 삼아 굳건한 협력 관계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래야 죽은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진혼이 될 수 있고 산 자들에게도 역사의 교훈이 될 것이다. 50주기를 맞은 하미마을의 망자와 유족들에게 뒤늦게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추도문 전문을 소개한다.
[스토리 칼럼]베트남 양민학살 위령비와 文대통령의 사과

「디엔즈엉은 예전에 강과 바다가 있던 곳으로, 신성한 이곳에서 락과 홍의 자손이 호앙선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땅을 열고 500년 전 나라를 세웠다. 사람들은 하미, 하깡, 하방, 하록, 지아록 등 마을을 세웠고, 이곳은 예로부터 평화롭게 살면서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으며 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땅이었다.

먹구름과 천둥, 번개가 치고 적이 마구 몰려와 평탄한 땅에 파도를 일으키고 마을 사람을 한데 모아 마을을 버리게 하고 고향을 버리게 했다. 칼로 끊는 듯 내장이 찢기는 아픔으로 주민들은 땅을 잃고 강을 잃고 바다를 잃고 농사일을 잃고 낚시일을 잃었다.

악독하고 끔찍하여라. 떨어진 목에서 흐르는 피, 경악으로 야자수 숲은 마른 머리카락이 떨어지듯 흩날리고 강은 휘어져 돌고 눈물은 고여서 늪이 되고 만이 된다. 거기에는 단두대가 있었고 교회는 갑자기 잿더미가 되었고 하지아 숲은 마른 뼈들로 흰색이 되었고 케롱 해변에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1968년 이른 봄, 정월 스무 넷째 날 청룡부대 군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흉포하게도 양민들을 미친 듯이 학살하였다. 하미 마을은 30가옥이 불에 타고 주민 135명의 시체는 산산이 흩어지고 태워졌다. 그 지역은 붉은 피로 덮였고 모래는 뼈와 섞이고 집들은 사람과 함께 불태워졌다. 탄 고기와 비린 피를 탐하는 개미들, 화염이 지나간 후 더욱 짙어진 어둠을 생각한다.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버지가 툇마루에 머리를 떨구고 쓰러져 있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이 있겠는가. 아이들이 신음하고 시체가 서로 포개져 쌓여 있다. 아직도 죽은 사람의 피가 말라서 고여 있고 아이는 엄마 배 위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젖을 찾는다. 어린아이는 입을 다쳐서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실 수가 없다.
[스토리 칼럼]베트남 양민학살 위령비와 文대통령의 사과

더 처참한 것은 그 후에 탱크가 무덤들을 짓뭉갠 것이다. 악마의 그림자가 드리운 대지 위의 메마른 뼈, 무고한 영혼의 외침이 푸른 하늘에 울려 퍼진다.

하늘은 어두울 때도 밝을 때도 있는 법. 지난 25년간 고향은 평화롭게 다시 세워지고 디엔즈엉 땅은 다시 비옥해지고 감자와 쌀이 잘 자라고 강의 물색도 좋아져 물고기와 새우도 많다. 당이 갈 길을 인도하여 거친 땅을 개간하였다. 과거 전쟁터의 아픔도 줄었다.
 
이 깊은 상처를 남긴 그때의 한국인은 지금 찾아와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용서 위에 비석을 세우고 고향 발전을 위한 인도적 협력의 길을 열고 있다.
 
모래와 소나무는 하미 학살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향불은 저세상의 영혼을 달래기 위함이다. 천 년의 흰 구름은 마을의 번영과 평안을 기원한다.
 
2000년 8월 경진년 가을
디엔즈엉 당, 정부, 주민」
하미마을을 떠나는 길에 만났던 아오자이 소녀들. 자전거를 타고 경쾌하게 오가는 그들을 보며 무겁던 마음이 다소 풀렸다. 2009.8.26

하미마을을 떠나는 길에 만났던 아오자이 소녀들. 자전거를 타고 경쾌하게 오가는 그들을 보며 무겁던 마음이 다소 풀렸다. 2009.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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