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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겁에 질린 가야금, 웃으며 흐느끼는 소프라노···황병기 '미궁'

등록 2018.09.19 14:47:24수정 2018.09.19 1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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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겁에 질린 가야금, 웃으며 흐느끼는 소프라노···황병기 '미궁'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심장을 쥐어뜯겨 겁을 먹은 듯한 이지영의 가야금 소리 위로, 소프라노 윤인숙의 신음과 도 같은 몽환적인 흐느낌과 기묘한 웃음이 더해졌다.

국립극장 전속단체인 국립국악관현악단이 18일 오후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선보인 '2018 마스터피스-황병기'에서 첫 곡으로 들려준 황병기(1936~2018)의 '미궁'은 여전히 괴작(怪作)이었다.

1975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미궁'은 4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실험적이고 낯설다. 첼로 활과 술대(거문고 연주막대) 등으로 가야금을 두드리듯 연주하고 인성, 즉 사람의 절규하는 목소리를 덧입은 파격 곡이다.

보통 국악의 어법과 너무 다르다보니, 어렵게 여겨지는 부분이 많아 거칠게 괴작으로 요약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괴이한 작품',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괴물 같이 강렬한 작품'으로 이해될 수 있다.

황병기의 가야금과 안무가 홍신자의 목소리로 초연했을 당시 관객이 비명을 지른 뒤 공연장을 뛰쳐나갔고, 2000년대 들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인터넷에 '미궁'에 얽힌 온갖 괴담이 퍼지기도 했다. 낯섬이 두려움으로 치환된 것이다.

악보가 없는 데다가 연주법이 독특하고 이런 신화까지 덧대진 곡이라 황병기가 세상을 떠난 후 후배와 제자들이 이 곡을 연주하는데 큰 부담이 따랐을 터.

하지만 이날 압축돼 재연된 '미궁'은 황병기의 음악이 얼마나 현대적이고 세련됐는지를 증명했다. 삶과 죽음 등 인생의 주기를 다룬 작품인데 가사 내용은 연주할 당시의 신문 기사를 주로 읽어 매번 달라진다. 이날 윤인숙은 'DMZ를 평화공원으로'라는 문장이 담긴 글을 읽어내려갔다.

[리뷰]겁에 질린 가야금, 웃으며 흐느끼는 소프라노···황병기 '미궁'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 평화를 위한 회담을 연 첫 날, 황병기의 유산은 시대를 뚫고 평화를 노래했다. 마침 남북정상의 합의문에는 'DMZ 평화지대화'도 포함돼 있었다. 남북 평화를 위해 앞장선 황병기는 1990년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해 연주하기도 했다.
 
이것이 거장과 클래식의 보기다. 인생의 주기를 다룬 '미궁'처럼 거장과 클래식은 돌고 돌아 세상의 변화를 함께 한다.

'미궁' 외에 황병기가 남긴 실내악 위주로 연주가 됐는데 현대음악 못지않은 도전정신과 참신함이 돋보이는 곡들이었다. 

황병기의 음악세계는 ‘전통을 뛰어넘어 현대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축약된다. 생전 여러 인터뷰에서 본인의 창작과 연주는 전통에서 벗어나 현대로 가려는 노력이라고 했다. 박제된 음악이 아닌 바로 여기 살아 숨 쉬는 음악, 전통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걸 일깨워준 것이 황 선생이었고 그가 남긴 음악이었다.

한국음악 사상 처음 창작된 현대 가야금으로 통하는 '숲'(1962)의 맑은 음색은 관객을 청량감 넘치는 숲속으로 데리고 갔다. 17현 가야금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새봄' 중 가야금 부분을 독립시켜 만든 '춘설'(1991)은 고즈넉함이 무엇인지 들려줬다. 삼중주로 편곡된 '시계탑' 가야금 소리에서는 하프 같은 우아함이 감돌았다.

[리뷰]겁에 질린 가야금, 웃으며 흐느끼는 소프라노···황병기 '미궁'

이날 마지막 곡은 황병기의 대표곡으로 그가 신라시대 불상이 춤추는 모습을 상상하며 쓴 '침향무'. 영상 속 황병기의 연주로 시작해 그의 제자들의 연주가 더해지고 소화초등학교 학생들 연주까지 합쳐지는 '점층된 다중합주' 방식은 이 곡의 치밀함과 역동성을 힘껏 꺼내보였다. 음악을 기억하는 자리가 아닌, 앞으로도 이어질 음악의 가능성을 목도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공연이 단순히 추모의 자리가 아니었던 이유다.
 
'2018 마스터피스-황병기'는 2018~2019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개막작이다. 두 번째 날인 19일에는 황병기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낼 때 창작 음악의 지평을 연 국악관현악 위촉곡 중 호평 받은 곡들이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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