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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결혼했던 그녀와 지금 이땅의 이주여성, 연극 '텍사스 고모'

등록 2018.10.19 16: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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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훈 연출, 윤미현 극작가

최용훈 연출, 윤미현 극작가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36년 전 텍사스 고모는 주한미군 리처드를 따라 텍사스로 떠났다. 그녀는 수영장이 딸린 이층집에서 보내는 우아한 일상을 기대했다. 현실은 달랐다. 텍사스 고모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괴산에 있는 오빠에게 되돌아왔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키르기스스탄에서 열아홉살 여자를 데려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골 마을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러나 텍사스 고모는 36년 전 본인의 모습이 떠올라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여자의 일이 남일 같지 않다.

국립극단과 안산문화재단이 연극 '텍사스 고모'를 공동제작한다. 26~27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별무리극장에서 공연하고, 11월 2~25일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무대로 이어간다. 

윤미현(38) 극작가가 쓴 '텍사스 고모'는 작년 안산문화재단이 주최한 '제4회 ASAC창작희곡공모' 대상 수상작이다. 안산을 배경, 소재로 하는 우수 희곡을 격년으로 뽑는 공모전이다.

작품에는 생계와 외로움을 걱정해야 하는 노년 등을 다룬 전작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처럼 소외된 타자를 톺아보는 글을 써온 윤 작가의 성향이 묻어난다.
 
주한미군과의 결혼을 통해 텍사스로 간 '텍사스 고모', 환갑이 넘은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 오게 된 '키르기스스탄 여인' 등 이주 여성들의 현실을 그린다. ASAC창작희곡공모 심사위원들은 "소외된 타자의 경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가해자로 변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날카롭게 드러낸 현실의식이 돋보인다"고 읽었다.

2015년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혼인 귀화자는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성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4배 많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국제결혼은 다양한 문제를 낳았다. 이주 여성들에게 지나친 노동을 강요하거나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인식이 보기다.
미군과 결혼했던 그녀와 지금 이땅의 이주여성, 연극 '텍사스 고모'

'텍사스 고모'를 뽑은 안산문화재단의 기반인 안산에는 다문화 인구가 많다. '지구촌 축소판'이라 불리는 안산의 원곡동은 2009년 전국 최초로 다문화 특별구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취재력이 돋보이는 윤 작가는 이번 작품을 위해 버스를 타고 읍내를 자주 다녔다. 작년 봄과 여름, 이주 여성들의 '리얼리즘적'인 삶을 지켜봤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주 여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픽션을 썼다.

극의 전반을 이끄는 두 여성 캐릭터 텍사스 고모와 키르기스스탄 여인은 각각 풍부한 연기 내공의 박혜진(60)과 독일 출신 배우 윤안나(26)가 연기한다. 

박혜진은 "텍사스 고모는 역지사지의 마음이 가득한 인물"이라고 봤다. 상황은 다르지만 키르기스스탄 여인처럼 역시 타지에서 와 한국에서 살아가는 윤안나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다른 나라 여성으로서 한국에 사는 것이 어떤한 것인지 공감이 됐다"고 했다. 

 독일에서 신문방송학과 한국학을 공부한 윤안나는 2013년 국립극단에서 김재엽 연출의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를 본 뒤 연극에 빠졌다. 이후 이듬해 김 연출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데뷔했다. "국립극단 무대에 서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국립극단 제작공연인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에 이어 윤 작가와 호흡을 맞춘 최용훈 연출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 꿨던 우리가 '코리안 드림'을 꿈 꾸는 이들을 무시하는 상황"이라면서 "우리가 당한 것에 대해 교훈을 얻지 못하고 악습을 답습하는 상황에 대해 돌아봐야 하지 않나 한다"고 짚었다.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에서 현대의 병폐를 블랙코미디 터치로 풀어낸 그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는 이번 작품에서도 씁쓸하지만 경쾌한 리듬을 포함시킨다는 계획이다.
연극 '텍사스 고모'

연극 '텍사스 고모'

이주 여성들 중에도 행복하게 잘 사는 이들이 있다. 이런 작품이 오히려 일부 이주 여성을 틀에 가두는, 대상화를 하는 것은 아닐까. 윤 작가도 "이분법적인 사고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라는 내적 갈등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행복한 사람을 들여다 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죠. 소외된 타자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만약에 한 쪽 편에 서야한다면 소외된 타자의 편에 서기로 했어요."

한편 '텍사스 고모'는 국립 공연단체와 지역의 문화재단이 협업한다는 점에서도 관심사다. 국립극단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죽고 싶지 않아' 등을 지역에 선보여왔다.

국립극단 이성열 예술감독은 "안산문화재단과 공동 제작하는 '텍사스 고모'는 앞으로 이어질 지역과의 협업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안산문화재단 백정희 대표이사도 "좋은 자원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국립극단과 함께 제작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더욱 완성도 높은 공연을 선보이는 동시에 더 큰 관심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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