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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끝없는 실험과 도발···이번에는 페미니즘 SF창극 '우주소리'

등록 2018.10.21 0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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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끝없는 실험과 도발···이번에는 페미니즘 SF창극 '우주소리'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공연연출가 김태형(40)이 국립극장 전속단체인 국립창극단과 손잡고 창극을 처음 연출한다. 21~28일 장충동 달오름극장에서 국립창극단 신창극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초연하는 '우주소리'다.

과학고와 카이스트 출신이라는 이색 이력의 김 연출은 SF문학의 거장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1915~1987)의 단편선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을 원작으로 삼았다.

'우주소리'는 1988년 일본 세이운상(星雲賞)을 수상하고, 1986년 휴고·네뷸러상에 노미네이트된 작품이다. 부모로부터 우주선을 생일선물로 받은 뒤 과감히 광활한 우주로 모험을 떠나는 소녀 '코아티'의 경쾌한 우주 탐험기다.

외계 생명체 '실료빈'에 감염돼 뇌를 침투당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뇌에 자리 잡은 외계 생명체와 아름다운 우정을 키워 자신이 '할 만한 멋진 일'을 선택한다.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한 능동적인 존재가 작고 어린 소녀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페미니즘 창극'을 표방하는 '우주소리' 역시 소녀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때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진취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김 연출은 원작의 배역·지명·과학용어를 그대로 살린 대사와 창극 특유의 운율을 살린 가사 작업까지 맡아 상상력을 아낌없이 분출한다.

김 연출은 "기본적으로 한국적인 것에서 가장 멀리 있는 우주로 가자는 생각으로 SF를 끌고 들어왔다"면서 "국립 단체에서 도발적인 내용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차피 '수궁가'나 '심청가'에 나오는 용궁이나 '흥부가'에서 박 깨고 나오는 도깨비가 은하계를 다루는 SF와 무엇이 다르겠느냐"는 마음도 있었다.

미국 중년 백인 남성을 연상케 하는 이름인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앨리스 브래들리 셀던이 지은 예명이다. 셀던은 여성하게 불리한 1900년대를 파격적으로 살아간 인물이다. 어린 시절을 아프리카와 인도를 여행하며 보낸 그는 화가이자 미술비평가로 활동하다 군에 입대해 군 정보원, CIA 정보원으로 일했고 전역 후 심리학 박사가 됐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란 필명으로 '가장 남자다운 SF를 쓰는 남자'라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작가의 신상이 밝혀진 후 '팁트리 쇼크'를 불러일으키며 충격을 안겼다. 1991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기념상이 제정, 젠더 문제에 대한 문학적 시야를 넓힌 SF 소설과 판타지에 상이 수여되고 있다.

김 연출은 셀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남자 작가라고 생각해 굳이 성별을 밝히지 않고 활동했어요"라면서 "같은 SF 작가들도 그녀가 남자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여자일리가 없다'고 여겼죠. 여성의 심리를 잘 읽어 여성을 잘 이해하는 남자라고 생각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김태형, 끝없는 실험과 도발···이번에는 페미니즘 SF창극 '우주소리'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의 내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야기 배경이 먼 미래임에도 '어린 소녀'가 우주여행을 떠나는 것을 무시하고 말도 안 되는 일로 치부한다.

이런 내용을 SF라는 장르로 풀어낸다는 것, 그 속의 낯선 언어들 탓에 일반 공연 관객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하지만 김 연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SF가 매력적인 것이 실험군과 대조군을 설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과학 실험을 할 때 다른 조건은 통제하고, 한 두 가지만 조건을 다르게 파악해서 그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 있는데 SF도 마찬가지죠. 다른 설정의 세계관 속에 벌어지는 사람의 이야기는, 좀 더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을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거든요. SF에서 사이보그를 다뤄도 결국 인간을 바라보게 되잖아요."

김 연출은 코아티가 실료빈을 바라보는 시선도 높게 평가했다. "코아티 아버지를 비롯해 남성 어른들은 코아티가 외계 생명체에 감염, 세뇌 당했다고 생각해요. 근데 코아티는 동료가 생겼다,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하거든요. 새로운 친구와 만났으니 대화로 풀어나가죠."

그런데 코아티, 실료빈은 생물학적 차이로 우정을 넘어서는 것으로 관계를 끝낸다. "실료빈은 코아티와 친구가 되고 싶은데 세포 차이 때문에 코아티를 끝으로 몰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요. 포자를 전염시키니, 사람들이 있는 우주선으로 갈 수도 없죠. 이런 고민들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굉장한 로맨스로도 읽히는 거예요. '사의 찬미' '델마와 루이스'와 닮아 있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당초 김 연출은 이 텍스트를 택하지 않았다. 처음 고른 작품에서 저작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뒤늦게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로 교체했다. 중간에 각색 작업이 더뎌진 이유다.

하지만 김성녀 예술감독과 국립창극단은 그를 믿고 기다렸고 김 연출은 덕분에 평안을 찾고 힘을 낼 수 있었다. "김성녀 감독님은 예인이잖아요. 산전수전 다 겪은 분이라, 제게 큰 힘이 됐어요. '국립'이 붙은 예술단체와 작업하는 건 사실 저와 맞지 않아요. 체계가 잘 갖춰진 곳인데 반해, 저는 자유분방하고요. 근데 국립창극단은 스타일이 달라요.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에너지에 대해 고민하는 걸 주저하지 않죠. 이번에 의미 있는 시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대학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연출 중 하나다. '모범생들' '카포네 트릴로지' '벙커 트릴로지'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등 장르, 형식을 불문하고 새로운 시도로 다양한 도전을 해왔다.

 2014년 처음 연출한 오페라인 베르디의 초기 걸작 '나부코'를 스팀펑크 장르로 풀어내는 등 특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할 때 과감한 시도를 해왔다. 이번 SF창극처럼 말이다.
'우주소리'

'우주소리'

김 연출은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라며 웃었다. "제가 오페라, 창극 연출을 잘 할 수 없어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 장르에 오래 몸 담은 분들을 어떻게 따라가겠어요. 그러니까 제가 몸 담고 있던 분야의 장점을 끌고 와서 새롭게 시도해보는 거죠."

또 이번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코아티 역에 조유아, 실료빈 역에 장서윤 등 출연 배우들인 국립창극단 단원들이 캐릭터 분석을 통해 직접 작창을 맡아 연습 과정부터 공동 창작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김종욱 찾기' 등 창작 뮤지컬계 '미다스의 손' 김혜성 작곡가가 만든 뮤지컬넘버스런 곡들도 섞여 들어간다.

극에서 사용되는 용어·언어·기호·지명·연산자 등을 모두 소리로 표현할 예정인데, 이는 소리의 한계성을 실험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 연출은 "창극에서는 소리로 시공간을 표현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면서 "시각적인 부분의 재현보다는 창자가 다 역을 소화해내듯 우리 소리 특유의 표현력을 통해 관객이 상상할 수 있도록 연출하고 싶다. 오히려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창극은 SF에 최적화된 장르"라고 강조했다.

무대디자이너 김미경, 조명디자이너 구윤영, 의상디자이너 홍문기, 안무 이현정 등 그간 김 연출과 작업한 '김태형 사단'이 이번에도 힘을 싣는다.

그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주변 동료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작업이 늦어지다 보니 미안하고, 죄송하면서 한편으로는 창피하기도 했죠. 그렇지만 이 양반들이 잘 만들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이번에도 셋업을 하는데 참 근사하게 나왔더라고요.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동료들이 있는 제가 '못해오지는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죠. 이번에 본적 없는 장면들을 기대하셔도 좋아요. 'SF 창극'이라는 자체가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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