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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지메르만, 찰나의 마법으로 그려낸 '불안의 시대'

등록 2018.10.21 09: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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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지메르만, 찰나의 마법으로 그려낸 '불안의 시대'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찰나의 마법들이 빚어낸 시대의 자화상.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62)이 건반 위에 시를 써 내려가자 공연장 안에는 조용히 음표만 쏟아져 내렸다.

지메르만이 19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에사 페카 살로넨(60)이 지휘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번스타인 교향곡 2번 '불안의 시대'는 기념비적인 무대였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미국 지휘자 겸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이 작곡하면서 '교향곡'이라고 명명한 이 곡은 사실 아주 세련된 피아노 협주곡으로 들을 수 있다. 

미국의 자연주의 시인 W.H.오든(1907~1973)의 동명 장시(長詩)에서 내용과 형식을 따왔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교향곡 또는 협주곡처럼 3~4악장 형식이 아닌 크게 2개 파트로 나뉜다. 각 파트는 다시 3개 파트로 각각 나뉜다.

시의 내용은 신념 없이 방황하는 중년 목사, 캐나다인 공군 장교, 젊은 유대계 여인, 해군 병사 등 네 사람의 정신 묘사로 이뤄졌다. 음악은 이를 거울처럼 반영한다.

이날 지메르만은 신경질적이면서도 고상함과 자유 분방함 그리고 멋스러움으로 점철된 이 곡의 음표들을 갖고 섬세하게 고막을 두드렸다.

'완벽한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음색은 그가 타건할 때마다 공중에서 알알이 투명한 결정체가 맺힌 것처럼 맑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발군은 두 번째 파트의 두 번째 곡 ‘가면극’. 네 사람의 신경질적인 떠들썩함이 독창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재즈로 표현된, 이 부분에서 지메르만의 울림은 네 사람이 아득하게 망막 앞으로 몰려드는 순간을 그려낸 점묘화(點描畵) 같았다.
 
점묘화는 점을 찍어 그린 그림이다. 지메르만은 피아노 건반을 찍어 순간순간 밀도 높은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오든의 시 속 인물처럼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의 시대'에 산다. 감동과 전율이 일지 않을 수 없던 이유다.

에필로그에서 관현악 연주를 침묵 속에서 오도카니 바라보다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 피아노 소리가 성스럽기까지 했다. 아릿하면서도 산뜻하면서 투명한, '피아니즘의 미학이란 이런 것'이라는 중얼거림이 절로 나왔다.
 
이번 공연은 지메르만이 15년 만에 내한한다는 것으로 올해 초부터 가장 주목받았다. 그런데 공연 관계자들이 가장 긴장한 공연이기도 했다.

2003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독주회를 열었을 당시 불법 녹음을 우려해 무대 위 마이크를 제거해 달라고 청하며 연주를 늦추는 등 지메르만의 예민함은 이미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평소 피아노를 비행기에 싣고 다닐 정도로 완벽주의를 자랑하는 그는 이번에 롯데콘서트홀이 준비한 피아노를 순순히 선택했다.

하지만 그의 완벽주의 성향은 여전했다. 공연장은 연주 도중 박수를 자제하고, 휴대전화 관련 매너를 지켜달라는 내용의 안내 멘트를 추가로 녹음해 연주 전 방송했다.

또 이 공연장에서 펼쳐진 다른 공연들과 달리 로비 모니터 공연 중계, 공연 기록 영상 촬영, 공연 사진 촬영 등이 불가했다. 힘들게 표를 구한 2000명에게만 오롯하게 주어진 선물 같은 무대였다.

연주가 끝난 뒤 끊임없이 이어진 박수와 수차례 커튼콜에도 지메르만은 앙코르곡을 연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의 시대'의 잔향은 더욱 소중했다. 

지메르만의 이날 대단한 무대에는 살로넨과 필하모니아도 크게 기여했다. 다루기에 순탄하지 않은 멜로리와 리듬이 난무하는 이 곡을 과장하지 않고 노련하게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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