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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 문화소통]세종대왕 왈···“공자는 중국인 아닌 노나라 사람”

등록 2018.10.30 06:10:00수정 2018.10.30 09: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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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집현전 8학사들은 훈민정음 해례본 21장 뒷면에서 공자(孔子)를 중국사람이 아닌 노나라 사람이라고 하였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8학사들은 훈민정음 해례본 21장 뒷면에서 공자(孔子)를 중국사람이 아닌 노나라 사람이라고 하였다.

【서울=뉴시스】 박대종의 ‘문화소통’

오늘날 사람들은 공자(孔子: BC551~BC479)에 대해 “논어 등에 나오는 고대 중국의 위대한 성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대왕과 집현전 8학사들은 불후의 명저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에서 ‘중국(中國)’이란 말을 사용하였음에도, 공자에 대해서는 중국인이 아닌 “노(魯)나라ㅅ사람”으로 기록하였다. 이 어찌된 일일까?

세종대왕과 지금 사람들 간에 의식의 괴리 및 수준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소위 금석문(金石文)과 같은 옛한자인 ‘고전(古篆)’까지 섭렵한 최고 수준의 고문자연구가였지만, 지금의 후손들은 한자교육을 매우 등한시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한자 인식 면에서 주파수가 달라 대부분 한문으로 작성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세종대왕이 전하려 하는 의사(意思)가 아직도 정확하게 소통되지 않고 있다.

1925년 7월 1일 광동에서 손문(孫文)이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세우기 전까지, 그 약칭인 ‘중국(中國)’을 공식 국가명칭으로 삼은 나라는 전무했다. 중화민국 이전에 서주 청동기 금문에서부터 각종 역사서에 나타나는 ‘中國’이란 말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황제가 있는 천하의 ‘중심국가(central nation)’ 또는 ‘중앙국가’의 준말인 일반명사였다.

물론, 많은 한자어나 영단어가 흔히 그러하듯 ‘중국’이란 용어 또한 몇 가지 다른 용례가 있었다. 1963년 섬서성에서 출토된 청동기 ‘하존(何尊)’의 명문에서 ‘중국’이란 용어가 최초로 나타난다. 하존 명문은 서주의 2대 왕인 성왕이 아버지 무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동쪽 도읍지인 성주(成周)를 세우는 일을 기술하고 있는데, 거기에서의 중국은 ‘낙양 분지를 중심으로 한 중원지구’를 뜻했다. 그리고 시경(詩經) 대아(大雅) 편, “백성이 또한 수고로운지라, 조금 편안하게 해야 할 터이니, 이 중국을 사랑하여, 사방을 편안하게 할지어다(民亦勞止라. 汔可小休니, 惠此中國하야 以爲民逑어다)”에서의 중국은 ‘수도(capital)’의 뜻으로 쓰였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책 훈민정음 중 ‘어제훈민정음’ 편을 번역한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제목 다음의 첫 문장 “國之語音(국지어음), 異乎中國(이호중국)”에 있는 ‘中國(듕귁)’에 대해 후손들의 오해가 없도록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주석을 달았다.

“中國은 황제 계신 나라이니 우리나랏 상담(常談: 일상어)에 강남(江南)이라 하나니라”

역사를 배운 이들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대 중국대륙에는 여러 나라들이 동시에 존재했다. 황제국=천자국이 천하 사방을 모두 통제하는 중심 국가였고, 그 주변엔 제후국들이 존재했으며, 그보다 더 바깥은 소위 ‘오랑캐국’이라 불리는 최변방 국가들이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된 것처럼, 공자는 황제국 사람이 아니라 노(魯)나라라고 하는 제후국 사람이었다. 기원전 1018년 2월 22일 갑자일에 당시 천자국이었던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서주(西周) 왕조는 전쟁 승리 후에 분봉(分封)을 단행하였다. 당시 무왕을 도왔던 일등공신이자 무왕의 아우인 ‘주공(周公)’은 최측근거리에서 왕을 보좌해야 하는 인물이었던 관계로, 그 아들 ‘백금(伯禽)’이 성왕 초기 BC1011년에 노나라 제후에 봉해지게 된다.

서주 초기에 성왕은 상나라 무경의 반란을 제압하고 상나라의 옛 도읍지였던 상구(商丘: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 일대)에 제후국인 송나라를 세우고 상나라 제신(속칭 ‘주왕’)의 형인 미자(微子)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공자의 선조는 이 송나라 사람이었는데, 후에 노나라로 망명한 바, 그런 관계로 공자가 노나라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세종대왕과 그 신하들은 황제국과 제후국을 철저하게 구별하였고, 공자를 중국사람이 아닌 노나라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나 후세의 우리들은 황제국과 제후국을 구별하지 않고 있고, 지금의 중국을 고대의 중국과 같은 개념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런 착각은 혼란(chaos)을 낳고, 그로 인해 세종대왕 및 훈민정음과의 소통에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문화강국이 되려면 조상 대대로 축적되어온 고문헌들과의 제대로 된 소통은 필수이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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