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초점] 울산지검, 사문화된 '피의사실 공표' 첫 기소 사례 만드나

등록 2019.01.22 11:35: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초점] 울산지검, 사문화된 '피의사실 공표' 첫 기소 사례 만드나


【울산=뉴시스】유재형 기자 = "헌법 제27조 4항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법리적인 판단은 오로지 재판에서 제시하는 증거 위에서만 해야 합니다. 재판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피고인을 죄인 취급하는 그 어떤 법정 관행도 본 변호인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영화 '번호인'에서 송우석(송강호 분) 변호사가 첫 재판에서 피고인이 수갑과 포승에 묶인 채 법정에 나오자 강력하게 항의하는 장면이다.

부당한 권력에 의해 인권이 묵살되는 상황과 치열하게 맞선 한 변호인의 모습이 깊은 울림을 주며 관객 1130여만 명이라는 놀라운 흥행 성적을 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보다는 수사 단계에서 확인되지 않은 피의사실과 수사상황이 상세히 공개되며 인권침해 논란이 심심찮게 일고 있다.

울산지검이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피의자에게 '죄수복'을 입히는 이 같은 관행을 막기 위해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 엄정 대처하기로 하면서 실제 기소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울산=뉴시스】안정섭 기자 = 27일 울산지방경찰청 변동기 광역수사대장이 지방청 프레스센터에서 고래고기 압수물 불법 환부사건의 중간 수사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2018.06.27. yohan@newsis.com

【울산=뉴시스】안정섭 기자 = 27일 울산지방경찰청 변동기 광역수사대장이 지방청 프레스센터에서 고래고기 압수물 불법 환부사건의 중간 수사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2018.06.27. [email protected]


◇사문화된 피의사실 공표, 수사기관의 인권침해 면죄부 역할

형법 제57조, 제126조는 공판 청구 전에 수사기관에서 보도자료 배포 등 언론을 통해 범죄혐의 등의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행위를 피의사실 공표로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반한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도주 중인 중범죄자에 대한 현상수배, 신종 보이스피싱 수법 설명, 오보 방지 등 공익을 위한 경우에는 인정된다.

이 같은 처벌규정에도 실제 처벌로 이어진 적이 없어 '피의사실 공표죄'는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더불어민주당 박주민(서울은평갑) 국회의원이 대검찰청 사건처리 현황 분석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7년부터 2018년 8월까지 11년이 넘는 기간 동안 385건의 피의사실공표죄 사건이 접수됐다. 하지만 이중 기소된 사건은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검찰이나 경찰은 혐의를 입증할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을 경우, 은밀하게 언론에 수사정보를 흘리거나, 기자회견, 보도자료 등의 형식으로 혐의사실을 발표, 수사에 유리하게끔 여론몰이 해왔다. 이같은 일은 수사기관에서 관행처럼 반복됐다.

국민의 알 권리와 관련된 중요사건이라는 핑계로 확정되지 않은 피의사실이 무차별 배포되며 당사자는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범죄인으로 낙인찍히는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당사자는 심리적 위축과 모욕감으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부작용도 종종 발생했다.

범죄 주체가 수사기관이다 보니 고소·고발을 당해도 기소권을 가진 검찰이 관행을 내세워 처벌에 적극 나서지 않으면서 수사기관의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울산지검은 이같은 부당한 관행에 대해 엄정한 사법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 지난해 8월부터 검사장과 차장검사, 부장검사, 평검사 등이 '피의사실공표죄 연구모임'을 결성, 총 8차례에 걸쳐 관련 민·형사 사례 분석과 법리 토론·연구를 진행했다.

이후 지난해 12월 13일 울산지방경찰청과 각 경찰서, 울산시선관위와 각 선관위, 울산시청과 각 구·군, 소방서, 해양경찰서 등 울산·양산지역 관련 기관 50여곳에 '피의사실 공포에 대해 엄단하겠다'는 방침의 공문을 보냈다.
【울산=뉴시스】박일호 기자 = 26일 오후 울산시 중구 울산지방경찰청 6층 대회의실에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울산지방경찰청 국정감사가 열린 가운데 황운하 울산경찰청장이 질의에 답변 하고 있다. 2018.10.26. piho@newsis.com

【울산=뉴시스】박일호 기자 = 26일 오후 울산시 중구 울산지방경찰청 6층 대회의실에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울산지방경찰청 국정감사가 열린 가운데 황운하 울산경찰청장이 질의에 답변 하고 있다. 2018.10.26.  [email protected]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엄단 방침, 경찰과 갈등의 불씨

울산지검의 '피의사실 공표' 엄단 방침이 '무죄추정의 원칙' 위반에 대한 정당한 수사권 행사라는 당위에도 불구하고 실제 처벌에 나설 경우 지역에 적지 않은 파문이 예상된다.

주된 수사 대상이 일명 '고래고기 환부사건'과 '김기현 전 울산시장 측근 비리' 사건으로 검찰과 대립각을 세워온 울산지방경찰청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황 청장의 경우, 두 사건을 사실상 진두지휘하며 수사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적 논란을 양산했다는 점에서 검찰 수사를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당시 경찰 수사를 두고 권력형 비리와 토착 비리에 대한 '성역없는 수사'라는 옹호론과 확인되지 않는 피의사실들이 무차별적으로 보도되며 관련자들의 인권은 뒷전이라는 비난으로 양분돼 지역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정작 수사 진척은 제자리걸음이었고, 경찰은 그 탓을 검찰의 수사 비협조로 돌리며 양 기관의 갈등이 격화됐다.

이후 자유한국당이 경찰의 무리한 수사로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며 황 청장을 직권남용과 선거개입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며 정치 쟁점화했고 논란은 더욱 확대 재생산됐다.

황 청장은 이와 별건으로 지난해 12월 수사경찰 4명과 함께 피의사실 공표와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검찰에 또다시 고발되기도 했다.

최근에 관련 사건을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 출신의 검사가 맡았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등 황 청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미 시작됐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울산시장 측근 비리사건으로 경찰의 집중적인 수사 대상이 됐던 한 인사도 억울함을 호소하며, 조만간 황 청장과 수사 경찰을 상대로 피의사실 공표 등에 대한 법적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는 입장이어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될 경우, 검·경간 갈등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검찰 관계자는 "단순한 선언적 의미로 검사들이 따로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 공부한 것이 아니다. 이제 국민의 인권에 대한 지킴이 역할과 함께 사법적 풍토를 바꾸겠다. 향후 어떤 변화가 올지 지켜봐 달라"며 처벌 의지를 명확히 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언론의 취재원 보호와 관련이 있는 만큼, 보도 경위 파악과 누가 피의사실을 공표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관건이 될 것"이라며 "계속 이 부분을 연구하고 있다. 실제 기소로 이어지면 전국 검찰청 최초의 사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검찰은 고소·고발이 없더라도 위법한 피의사실 공표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이 같은 검찰의 단호함은 일선 경찰들의 태도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한 경찰관은 “검찰의 공문을 받은 이후 부서별 보도자료 제공이나 브리핑을 여는 데 뜸한 게 사실"이라며 "최근 한 수사사건 보도자료를 배포하려 했으나 내부 논의를 거쳐 결국 취소한 적도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경찰은 “피의사실 공표죄의 본보기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개인적으로 친한 기자들에게도 말을 조심하고 있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