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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용산참사10년' 사모님은 이제 그곳에서 노점을 한다

등록 2019.01.20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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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로 남편 故 양회성씨 잃은 김영덕씨

남일당 건물 있던 재개발 구역서 노점상

"경찰 사과 없고 검찰은 외압…靑 나서야"

"노점하며 건물위서 '나 보고 있나' 물어"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 지난 18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옛 남일당 건물 터 앞에서 만난 용산참사 유족 김영덕씨. 2019.01.19. mangusta@newsis.com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 지난 18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옛 남일당 건물 터 앞에서 만난 용산참사 유족 김영덕씨. 2019.01.1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안채원 기자 = "남일당이요? 모르겠는데요."

지난 18일 찾은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맞은편. 거리에서 만난 시민에게 남일당 건물을 위치를 묻자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변은 높은 건물들과 공사장 가림막뿐이었다. 그 안에서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세워지고 있었다.

그곳은 10년 전인 2009년 1월20일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이 있던 곳이었다. 재개발 사업에 반대하던 주민들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5명의 철거민과 경찰 1명이 희생된 바로 그 곳이다.

흔적은 없어져도 기억이란 건 다르다. 세월이 흘러도 생생하다. '용산참사'로 남편 고(故) 양회성씨를 잃은 김영덕(63)씨가 그렇다.

김씨는 남일당 건물이 있던 재개발 사업 공사장 앞에서 현재 노점을 운영 중이다. 10년 만에 이곳에 돌아온 셈이다. 그 이유가 뭘까. 지난 18일 낮 노점에서 김씨를 만났다.

두 평 남짓한 공간에 서 있는 김씨는 기름 가득한 네모난 철판 앞에서 능숙하게 호떡을 굽고 있었다.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지난해 10월부터 했어요."

그전까지는 두 아들과 함께 8년 간 인근 대학가에서 주점을 했다고 한다. 사정이 어려워졌고 결국 지난해 가을께 문을 닫았다.

김씨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제 파출부라도 해야겠다고 했는데, 주변에서 '형님 자존심에 절대 못 한다'며 만류했다"며 "지인 중 호떡장사를 하던 사람에게 한 달간 꼬박 기술을 배웠다"고 말했다.

처음엔 서울 관악구 집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주변 상인들의 텃세가 심했다. 자리싸움이 없으면서도 친숙한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곳이 용산 남일당 건물 앞이다.

김씨는 남편과 함께 용산에서 복집을 운영했었다. 자리를 잡고 단골들도 생기고, 그렇게 5년 정도 됐을 때였다. 난데없이 재개발 소식이 날아들었다.

"조합 측에서 제시한 보상액은 터무니없는 금액이었어요. 집 담보대출까지 받아 차린 가게인데 이렇게 나가면 몇 억원 빚더미에 올라앉고 길거리에 나 앉아야했어요."

버틸 수밖에 없었다. 강제 철거가 시작되며 대치는 심해졌다. 1년 정도 흘렀을 때 남편은 망루에 올라간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협상이 좀 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내가 '당신은 항상 물가에 내놓은 것 같아 걱정된다'고 했더니 건물(남일당) 아래에 오면 내려보겠다고, 오라고 했어요."

남편은 아이들에게 "아빠가 가게 문제 때문에 자리를 비우니까 엄마를 잘 부탁한다"고 일러뒀다. 그리고 약간의 음식과 숙박도구 등을 챙겨 집을 떠났다. 2009년 1월18일, 겨울 밤이었다. 길어야 일주일 정도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 용산참사 유족 김영덕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옛 남일동 건물 터 앞에서 노점상을 운영 중이다. 뒷편으로 재개발 공사장이 보인다. 2019.01.19. mangusta@newsis.com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 용산참사 유족 김영덕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옛 남일동 건물 터 앞에서 노점상을 운영 중이다. 뒷편으로 재개발 공사장이 보인다. 2019.01.19. [email protected]

악몽은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19일 아침께 남편을 보러 간 남일당 건물 앞은 수많은 경찰 병력이 막고 서 있었다. 행여나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건너편에서 종일 발을 굴렸다. 그리고 20일 새벽께 집에 돌아갔다. 몇 시간 후 이른 새벽, 현장을 지키던 동료로부터 '먹을거리로 빵을 좀 사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빵보다 밥이 낫겠다 싶어 밥을 짓고 간단한 찬을 챙겨 운전대를 잡은 게 오전 6시께였다. 이상하리만치 도로가 꽉 막혀있었다. 가게를 하며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한 길이다. 그 시간대 막혀본 적이 없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 울부짖는 소리와 소음이 들려왔다. 현장 동료가 "불이 났다"고 울면서 말했다.

"첫 질문이 '사람은?' 이었어요. 모른다는 거예요. 울지만 말고 누가 다쳤는지, 죽었는지 좀 알아봐달라고 하고 끊었죠"

그때까지 남편이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빨리 가서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도착하니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회색빛 연기, 다친 사람들, 경찰에 연행되는 사람들, 건물을 에워싼 경력들로 어지러웠다. 사망자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몇 명인지, 그게 누군지도 알 길이 없었다. 남편의 생사도 모른 채 밤이 찾아왔다.

남편을 마주한 것은 날이 바뀐 21일 새벽, 5구의 시신이 있는 병원이었다. 이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부검까지 마친 상태였다. 경찰은 시신 1구를 지목하며 "김영덕씨 남편"이라고 했다. 알아볼 수가 없었다. 신체 일부가 절단되고 살점은 없었다. 김씨는 "5명 모두가 그랬다"고 말했다.

"남편 송곳니가 유독 크고 좀 뾰족했어요. 그리고 왼쪽 정강이에 작은 흉터도 있거든요. 그걸 찾아보려는데 앞니도 모두 없고 종아리는 살이 없이 뼈만 보였어요. '내 남편이 아니다'고 했어요."

그러던 중 벌어진 입 사이, 아래 어금니 쪽에 반짝이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남편은 생전 어금니를 금으로 덧씌운 적이 있었다.

"그때요. 그 어금니를 보고, 인정한 거예요." 김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후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검찰은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해서는 무혐의를 내리고 시위대의 화염병이 화재 원인이라고 결론 지었다. 유족의 수사기록 공개 요청도 거부했다. 김씨는 "사건 후 1년 동안은 항상 길거리에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 지난 18일 용산참사 당시 남편을 잃은 유족 김영덕씨가 뉴시스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1.19. mangusta@newsis.com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 지난 18일 용산참사 당시 남편을 잃은 유족 김영덕씨가 뉴시스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참사 10주기를 맞은 김씨는 "또다시 싸워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2019.01.19. [email protected]

그리고 문재인정부가 들어섰다. 경찰은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고 지난해 9월 용산참사가 경찰의 무리한 진압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김씨가 올해 10주기를 맞이할 때는 '조금 다르겠다'고 생각했던 이유였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지난해 7월 용산참사를 재조사 사건으로 선정, 조사를 진행해왔지만 지난해 말께 중단됐다. 조사팀 인원들이 수사 외압 등의 이유로 사퇴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적절한 시기에 사과하겠다"며 아직 공식 사과는 하지 않았다.

"경찰은 무엇을 더 파악하고 사과하기까지 기다리겠다는 겁니까. 당장 사과해야 합니다. 또 검찰이 수사를 제대로 안 하겠다면 대통령이, 청와대가 나서야 합니다."

결연한 마음의 한구석에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남편과는 소개로 만나 2년을 연애했고 30여 년간 결혼생활을 했다. "전라도 사람이라 표현이 서툴렀지만 술 한 잔 들어가면 애정을 표현하는" 남편이자, "아이들에게 잔소리 한번 한 적 없는" 가장이었다.
 
김씨는 남편을 떠나보낸 후 오랜 기간 수면제에 의존해야 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용산, 그 남일당 건물 아래서 그는 가끔 남편에게 말을 건다고 했다.

"집을 나설 때 자기가 보고 싶으면 건물로 오라고, 자기가 내려다 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물어보는 거죠. 지금 나 여기 있는데 보고 있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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